“아이쿠, 언니는 성질 좀 죽여야겠다. 남자를 휘두르고 살 팔자야.”
“맞아요. 얘가 그래요. 아저씨 진짜 잘 맞춘다.”
꺄르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20대 중반의 여자들 사이에서 주거니 받거니 화려한 입담을 이어가고 있는 한 아저씨. 그의 앞에 높여진 노트북에는 사주팔자로 보이는 점괘가 풀이돼 있다. 압구정이나 대학가 근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점 보는’ 풍경이다.
“올해는 내 운세 좀 트이려나?” 새해가 되면 슬그머니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정통 철학관을 찾는 건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럽다. 점이야 어디까지나 재미로 보면 되는 것을, 가볍게 즐기고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곳이면 가장 좋다. 신년운세가 궁금한 이들이 ‘철학관’을 벗어나 ‘사주카페’를 찾는 이유다.
◆사주카페, 텅텅 비거나 가득 차거나
지난 13일 저녁 압구정. 신세대들이 자주 찾는다는 점술 카페들이 한집 걸러 하나씩 모여 있는 점술 밸리를 찾았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사주카페인데도 분위기는 카페마다 전혀 다르다. 이미 날은 저물어 저녁시간이 다 되어 있는데도 손님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는 사주카페들이 대부분. 그러나 그 사이에서도 유독 손님이 북적거리는 사주카페들이 눈에 띈다.
사주프라임의 역술인 현담 씨는 “불황은 불황인지 예년과 비교해 손님이 줄기는 많이 줄었다”면서도 “그래도 소문 난 곳은 아직도 두세 시간씩 기다려 점을 보고 가는 분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그는 “젊은 여성들의 경우 친구를 따라 커피도 마실 겸 재미로 점을 보러 오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점 잘 보는 선생님’을 일부러 찾아와 진지하게 상담을 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그런 이들일수록 사주카페를 직접 방문하기 전에 입소문이나 인터넷을 통해 철저한 사전 조사를 거치기 때문에 쏠림 현상이 갈수록 더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점술 즐기며 '인생 상담', 최근 '이직' 고민 많아 북적거리는 사주카페 한곳을 찾아 들어갔다. 점집이라고 하기에는 밝은 조명과 세련된 인테리어가 여느 카페와 다르지 않다.
한쪽에 마련된 신당 역시 기존에 생각하던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다. 꽃무늬 벽지를 바른 신당에는 고풍스런 느낌의 탁자가 놓여 있다. 전혀 무당 같지 않은(?)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정해 씨가 신점을 봐주는 공간이다.
정해 씨는 “예전에 신점이라고 하면 왠지 음침하고 폐쇄된 분위기가 강했지만 최근에는 오픈된 공간으로 나오면서 점술의 성격 역시 많이 변한 것 같다”며 “기존의 신점이나 점술이 말 그대로 ‘미래를 점치는 것’이었다면 최근에는 자신의 생활과 밀접한 고민을 털어놓고 방향을 잡기 위한 ‘상담’의 역할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요즘 점을 보는 이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은 무엇일까? ‘진로’와 ‘이성’ 문제는 시대를 불변한 공통의 관심사다. 하지만 최근에는 불경기 때문인지 유독 ‘취직’이나 ‘이직’에 관한 상담이 늘었다고 한다.
홍대 앞 '재미난 조각가 사주카페'의 유흥관 역술인은 “불경기를 반영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점괘 역시 좋게 나오는 경우가 드물다”며 “사업을 하시는 분들도 기존에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될까’하는 질문이 많았다면 요즘에는 ‘사업을 접어야 할까 계속해야 할까’ 등을 묻는 경우가 더 많다”고 귀띔했다.
◆치열한 경쟁 ‘역술인들의 세계’
“지금 사주 봐준 선생님 어때요? 솔직하게 말해줘요.” 압구정의 한 사주카페. 방금 사주풀이를 마친 기자에게 카페 주인이 살짝 다가와 물어본다. 설명을 들어보니 기자에게 사주풀이를 해 준 이는 말하자면 이 사주카페의 ‘2개월 수습 사원’. 새로운 직원의 점술 풀이가 정확한지, 쉽고 시원시원하게 손님들에게 잘 전달 해주는지 등을 사장이 직접 평가해 최종 직원으로 채용한다는 것이었다.
“요즘 손님들은 눈이 매서워요. 사주풀이도 일종의 기술인데, 말하자면 이 ‘기술력의 차이’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거든요.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경력 관리를 치열하게 할 수밖에 없죠.”
홍대 앞에서 10년이 넘게 사주카페를 운영해 온 ‘재미난 조각가 사주카페’ 유준상 사장은 "그러니 운영자의 입장에서는 역술인을 뽑는데 갈수록 까다로워 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최근에는 망하는 사주카페들이 늘어나면서 가게까지 일부러 찾아와 여기서 일할 수 없냐며 넌지시 자신의 명함을 건네고 가는 경우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역술인들 사이에서도 소위 ‘잘 나가는 사주카페’에 취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정확한 사주 풀이는 기본, 손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시원한 말솜씨와 호감 가는(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를 갖추면 금상첨화다. 여기에 최소 10년 이상은 현장에서 실력을 익히며 좋은 평판을 얻어야 기본 자격이 갖추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뚫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한 역술인의 설명이다. 입 소문을 잘 타기만 하면 여러 명의 단골손님을 확보, 점괘를 보는 시간당 기본료가 올라가는 것은 물론 틈틈이 방송 출연 등으로 부수입까지 짭짤하다. 한달에 800만원까지 고수익도 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최근에는 역술인들마다 독특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도 치열하다. 사주풀이에서 한 발 더 나가 주역을 기초로 한 ‘육효’나 중국 별자리점 중 하나인 ‘자미두수’ 등 특기라 할 수 있는 역술 한두가지를 더 개발하는 경우가 많다.
신내림을 받고 점괘를 보는 신점 역시 마찬가지. 한 역술인은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방울이나 쌀, 엽전 등을 이용해 신기를 더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천호동에서 사주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점술천하' 이현덕 사장은 “예전에는 사주카페에서 가볍게 경력을 쌓고 자신의 철학관을 차리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반대로 실력 있는 점술가들도 사주카페로 오기가 쉽지 않다”면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치열한 경쟁 분위기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