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삼순이는 삼순이로 남았지만, 현실 속 삼순이와 삼식이들은 개명신청서를 집어들었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범죄은폐나 법적 제재 회피 등 의도가 없다면 원칙적으로 개명을 허가해줘야 한다”고 결정한 이후, 개명신청은 2배가 넘었다. 남다른 이름으로 본의아니게 주목받으며 살아온 사람들. 이들의 특별한 이름은 드라마 속 삼순이의 불평처럼 ‘부모가 무책임해서’인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돌림자나 한자뜻에 연연한 탓이 더 크다. 이름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며 함부로 개명하면 안된다는 오래된 충고에 대해 이들은 말한다. “이름은 운명이 아니다. 평생 놀림받을 운명이라면 몰라도”. 2006년 이름 풍속도를 돌아봤다.
#이름은 운명이 아니라 이미지다
인터넷 작명소에서 둘째 아들 ‘승준’의 이름을 지은 아빠 이정은씨(35)는 돌림자를 포기했다. 여성스러운 이름 때문에 늘 고민했던 이씨는 작명조건에 돌림자 대신 남자느낌이 나는 ‘준’자를 꼭 넣어줄 것을 주문했다.
스물여덟의 예비 엄마 채희영씨는 느낌이 좋은 이름을 찾고 있다. 뜻도 중요하지만 평생 더불어 살 이름이니 좋은 인상과 이미지를 줄 수 있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채씨는 “부모세대는 잘 살기를 기원하는 뜻을 중요시했지만 신세대 부모들은 어감과 남들의 반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채씨는 “친척 중에 시부모님이 돌림자를 고집하며 너무 고전적인 이름을 지어와 아이 엄마가 단식투쟁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요즘 신세대 부모는 국제화 시대에 맞춰 영어 표기와 발음상 무리가 없는지도 고려하고 있다. 작명소에서도 여성이름에 많이 들어갔던 ‘은(eun)’자를 잘 쓰지 않는 추세다. 모음이 두번 이어지는 표기가 콩글리시에 가깝고 외국인들이 정확히 발음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유진’ ‘민아’ 등은 흔해 보이지만, 영어이름으로도 함께 쓸 수 있어 꾸준한 인기를 모은다. ‘린’ ‘빈’자는 어감이 좋다는 이유로 여성은 물론 남성이름에도 많이 쓴다.
#이름은 브랜드다
연예인들에게 이름은 확실한 전략이고 브랜드다. 촌스러운 본명을 가리기 위해 예명을 쓰던 시대는 갔다. 가수 ‘비’의 이름은 프로듀서 박진영씨가 녹음할 때마다 비(雨)가 내렸다는 이유로 지었다. 한국과 아시아, 미국을 넘나드는 그의 활약을 보면 훨훨 나는 ‘비(飛)’자가 떠오른다.
‘비’는 연기를 할 때는 본명인 ‘정지훈’으로 돌아온다. 음악과 연기, 양쪽에서 나름의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이름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같은 이유로 강타, 에릭 등도 드라마에서는 본명을 사용했다. 싸이, 별, MC몽의 본명은 각각 박재상, 김고은, 신동현으로 촌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각자의 개성과 느낌을 살린 예명으로 팬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이민호라는 이름대신 ‘붐’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VJ 붐은 아예 ‘붐업(Boom up)’이라는 노래까지 발표했다.
회사원 손영훈씨(31)도 아이에게 독특한 이름을 지어 줄 계획이다. 비즈니스를 해 보니 이름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란다. ‘영훈’이라는 이름이 흔해 상대방이 잘 기억하지 못했다며, 첫인사때 확실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이름을 짓고 싶다고 했다. 각종 비즈니스 전략서에는 “이름을 잘 기억하라”는 주문이 빠지지 않는다. 상대방의 이름을 잘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전략의 하나라고 충고한다.
#이름은 놀이다
요즘 네티즌은 이름을 갖고 논다. 할리우드의 섹시 스타 ‘안젤리나 졸리’는 졸음에 겨운 여인(안자려나 졸려)이 됐고,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은 반창고 브랜드(대일밴드 베컴)가 됐으며 최신형 아파트 ‘e-편한세상’은 이기적인 아파트(지편한세상)가 됐다.
몇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아이디 놀이’는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그때 그때 새로운 패러디와 유머를 버무려 네티즌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남의 이름으로 하는 패러디지만, 인터넷 초기에 제2의 이름이라며 멋진 단어로 아이디를 만들려고 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요즘엔 ‘멋있는 아이디’보다 ‘재밌는 아이디’가 뜬다.
족보용 이름은 가고, 이름은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로 변하고 있다. 집안 어른들의 생각보다는 나와 커뮤니케이션할 사람들의 반응이 더 중요해졌다. 누군가에겐 운명, 누군가에겐 패션, 누군가에겐 브랜드인 이름. 당신에겐 어떤 이름이 좋은 이름일까?
이름전문가 배우리씨는 이름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산 명사들의 이름도 분석해보면 안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좋아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이름이 중요합니다.”
〈장은교기자 indi@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