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길한 것이고, 무엇이 흉한 것인가?
인간사 생로병사는 길흉이 분명하니 정확히 살펴야 할 것이다.
사람이 늙는 다는 것은 흉한 것이다.
사람이 늙지 않는 다는 길인데 과연 그럴수 있나 싶다.
대개 사람이 태어나 25세까지 성장기이고 이후는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
병들지 말고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 길이니 나머지는 흉이 될 것이다.
사람은 살기위에 어떻게든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길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니 신체의 건강을 유지해야 하고, 더불어 정신도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남녀의 만남의 길흉에 있어 만나는 것은 길에서 흉으로 가는 것이고,
헤어지는 것은 흉에서 길로가는 것이라 해서 만나지 말라는 것은 미친짓이다.
사람이 인연이 되어 만나는 것은 언젠가는 헤어짐이 있는 것이고,
또한 이별은 다시 새로운 인연과 만남이니 길흉이 교차되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고 여자가 남자를 만나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고 순리다.
그러나 사회적 제도가 결혼을 해야 하고 이혼도 해야 하니 이것이 문제다.
사회라는 것은 일정한 규칙과 관례가 있고 상식이 존재하니 이것이 관인이다.
관이 인을 상생하여 관인상생한다는 것은 사회기준에 적법한 인물로 산다는 말이다.
재생관으로 살아가면 인기와 여론에 부합된 인물이니 평범하고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재생관하고 관인상생하면 틀림없이 사회적으로 귀감이 되는 인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지 않고 반대로 비틀려 있는 운명이 우리주변에는 더 많은게 현실이다.
그러나 일단 식상태과하고 재성이 투간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자.
일단 상관견관하고 재극인하는 조건이면 상식적이지 않고 평범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남녀는 이들만이 살아가는 방법론이 있는데 재생관에 맞추려니 하자가 많은 것이다.
이래서 부부사이는 아무도 모르고 둘만이 아는 것이니 상식이라는 잣대로
평가되거나 잘 잘못을 따져 편을 들어 줄 수 없다고 지긋하신 연배의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여명이 식상격으로 식상태과하다는 것은 가장의 사주이다.
자기 하고픈 대로 하고 살자고 태어났으면 그렇게 살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양반이 관인상생되는 이웃집 여자의 명을 부러워하면 머리에 뚜껑만 열릴 것이다.
관인상생되는 이웃집 여자는 능력이 있고 자기 하고픈데로 사는 식상격여자가 부러울 것이다.
일단 재성이 투간되면 재극인하기 쉬어 역활이 불분명해지고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쉽다.
관이 인성을 생하는 것을 재극인하면 여자의 권리를 누리지 말라는 말이며,
인성이 일간을 생하는 것을 재극인하면 자기 혼란을 상대를 의심하는 것으로 쓸 것이다.
식상을 조절하는 인성을 재극인하면 일면 포기하고 일면 다시 살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재극인은 결국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넌 가만히 있어라는 말과 같다.
눈앞에 현실을 충족하기 위해서 과거나 먼발치의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는 우매함이다.
상관견관이라는 것도 결국 눈과 귀가 거슬린다하여 반응하는 성질머리와 같다.
약이 쓴것은 다스림에 필요하고 사탕이 달콤한 것은 유혹과도 같은 끌림인 것이다.
관살이라는 것은 일간이 두둘겨 맞아 견디어야 하니 쓴 약과 같다면,
식상이라는 것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편리함이니 사탕과 같은 것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다.
이는 몸을 고생시키고 마음을 고생시켜 몸과 마음의 행복을 찾으라는 말이다.
몸과 마음이 행복한 사람은 같은 일도 긍정적이고 능동적으로 임한다.
몸과 마음이 불행한 사람은 같은 일도 부정적이고 수동적으로 임한다.
딱 한 끝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사라고 한다면 사람은 어리석은 것이다.
몸과 마음을 기쁨으로 인도하는 것은 몸을 부릴수록 단련되고 마음은 포기할수록 기쁨두배이다.
보너스라는 인생사라고 한다면,
덤으로 산다는 인생사라고 한다면 행복하지 않나 싶다.
이는 마음이 아파 죽을것만 같은 것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하는 말이다.
몸이 아파도 죽을것만 같은데 마음이 아파도 죽을것 같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인생사 가지면 가질수록 고통이 따르는 법인데 포기하자니 죽을것 같은 고통이 따르나 보다.
사람이 교육을 받는 이유는 사람답게 살기위해서 이다.
사람이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동물적 인간상이 이성적 인간상으로 바뀌는 것도 고통이다.
모르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는 것이다. 알면 알수록 우려와 걱정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여자의 명이 재생관 관인상생하라고 했더니...
반대로 비식형 식상생재 재생관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모두 옳다고 박수만 쳐달라는 것인데 이처럼 관대한 남자는 흔하지 않다.
물론 여자가 돈 벌어다 주고 안 밖에 일을 다하고 남자는 그져 집지키는 강아지처럼 사육하는데로
주면 주는데로 안주면 안주는 데로 감사하고 사는 남자를 만나면 행복하게 살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리 검은 짐승은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남자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을 포기하실 수 있습니까하면?
노우~! 하는 여자라면 결혼은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분 포기한다면 결혼할 수도 있다.
길흉이라는 것이 욕심과 욕망이 크면 클수록 흉이다.
그래도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간절하고, 일년이라는 시기를 참아 내지 못하니 흉을 자초하는 것이다.
대개 이 삼년을 그나마 버티면 행복인 것이다. 10년을 산다는 것은 산전수전인 것이다.
길흉의 기준이 가지고 있는 달콤함이 스스로 흉은 자초하는 듯도 하다.
길에서 흉으로 가는 것은 슬픔이지만 흉에서 길로 가는 것은 희망인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구르의 나무를 심는 것이 인간의 도덕성이다.
내일 이별을 한다해도 이순간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노력이 성인의 판단이다.
내일이 밝지 못하다 하여 미리서 포기한다는 것도 스스로 복을 차는 것이다.
과정이 없는 결과는 없고 원인이 없는 과정은 없는 것이다.
남녀가 만나 오래 가고 오래 함께 살아가는 것이 길이라면 짧게 가는 것이 흉이라 말하는 모양이다.
시간이 오래가고 지속시키려면 인성이 유무로 결정되어지는 것인데 이는 자기 최면과 같은 것이다.
무인성하면 적응력이 빨라 짧고 굵게 살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실수라 하는 것은 인성이 있는자의 선택이지 무인성하면 실수를 묻지 않는다.
행복은 쌓이는 것이다.
사람의 만남에는 역활이 분명이 존재한다.
남녀를 만나 서로 신체의 건강을 잃을만큼 불편하지 않다면 이것은 길이다.
감정적으로 사회적 가치기준으로 갈등은 극복해야 하는 것이 성인의 능숙함이다.
이것을 흉이라 하여 피하고 외면을 부추긴다면 의사가 환자를 방치하고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이겨낼수 있는지 묻고 확인하는 것이 상생으로 함께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가 온다...흉인가 길인가?
모든 것이 균형과 질서를 잡기위한 과정이지 싶다.
출처 : 재혼의 길흉에 대하여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