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왕절에 토는 정착과 이동에 관여한다.
화왕절에 토는 아지트와 도피처에 관여한다.
금왕절에 토는 휴양과 안식처에 관여한다.
수왕절에 토는 창고와 저장 보온에 관여한다.
생뚱맞은 생각이다. 아이디어는 기발하고 해괴망칙한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토라는 것은 삼라만상의 중심에서 변화를 주재하고 주도하는 주체인 것이다.
육신으로는 인성과 같고 육친으로는 어머니처럼 삼라만상으로 포옹하고 있다.
음양으로는 목화금수라는 것을 양으로 한다면 토라는 것은 음으로 활용된다.
상생이 안되는 것을 움직이게도 하고, 상생이 잘되는 것은 더욱 잘되게도 한다.
상생이 필요이상 잘되는 것은 조절하기도 하니 주재하고 주도하는 중심이다.
토는 상극에서 상생을 주재하고 주도하는 것이다.
토의 상극은 인식체계의 출발과 같아 목극토는 시작과 정착을 주관하는 것이다.
목의 발산지기를 성장적인 성향으로 살펴 보면 변화와 이동을 하는 것과 같고,
이를 표현하고 통변하여 토를 보면 정착을 하니 유목민이 문명을 이루는 것과 같다.
수는 대자연이 주는 숲과 같고, 동물이 다니는 행로와 같은 것인데 산이 있어 물길이
생겨지고 물길이 있어 다시 산이 생겨지는 것과 같으니 수와 토의 상극은 쓰임일 뿐이다.
토의 상극인 목극토와 토극수는 이론적으로는 극이나 삼라만상으로 보거나 음양으로 보면
상생인 것이다. 고로 목극토는 상생하는 것이고 토극수도 상생하는 것이다.(미친놈 되자)
화생토는 이론으로는 상생이나 삼라만상적 관점이나 음양적인 관점으로는 상극인 것이다.
토생금도 그러하다. 자연은 상극속에 상생을 주관하는 것이다.
인간사는 상생속에 상극을 주관하는 것이다.
토는 이런 상생과 상극을 易으로 주도하는 중재자와 같다.
계절에 따른 토의 쓰임이 그러한데 12지지에 따른 戊己토의 쓰임은 또한 유별할 것이다.
점심먹고 잠시 짬나는 시간에 土를 생각하니 횡하니 스치는 바람처럼 스쳐지나간다.
이것이 우연에 의한 것인지 필연에 의한 것인지 여튼 아이디어는 횡하니 떠오르는 것이다.
토를 안다는 것은 결국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숙지하고 알아야 하는 문명이고 문화인 것이다.
토가 어렵다는 것은 인간사의 모든 문명과 문화를 알고 이해해야 중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는 마치 공기와 같아 함께하면서도 인식 되어지지 않고 함께하는 필요 충분조건인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찜질방에도 산소방도 있고 탄소방도 있고, 질소방도 있는 시대가 왔다.
산소방에서 사람이 피로가 풀리기도 하고 질소나 이산화탄소방에서 질식사도 하는 시대가 왔다.
인식의 전환, 의식의 전환이 되지 않고는 토를 공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토는 백과사전과 같이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신 지식인처럼 산경험이 있는 각방면에 전문가와 같다.
다음에만 봐도 신지식인에는 각방면에는 많은 유경험자와 산증인들이 전문가로 대접받는 시대이다.
이것이 토라고 한다면 토를 안다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역량과 경험과 역활을 다 아는 것과 같다.
이를 알지 못하고 한낱 목화금수로 점을 치려는 점쟁이는 土를 모르고 점을 치려는 것과 같다.
土라는 것은 바로 인간사가 정해놓은 형식과 규범, 약속이나 지켜야할 준수사항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土를 기반으로 목화금수를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목화금수를 통하여 토를 이해해야 하는지는
각자의 역량이지만 土를 안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土는 위대하지도 절대 평범하지도 저속하지도 않게 우리 옆에 당연시되고 있는 것이다.
토를 알려면 세상을 알아야 하고 세상을 알려면 티브이 시사나 드라마가 제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