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리는 운명을 이해하는 학문입니다. 대개 명리의 시작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하나 알면 알수록 실망스럽고 모르면 모를수록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뿐인 자신의 命인가 봅니다.
하나를 알면 실망스럽다가 둘을 알면 작은 희망도 생겨지고 셋을 알면 결국 주어진 환경에서의 자신이 해야할 역활에 실망도 희망도 거부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는 자존감을 찾는 과정입니다.
운명의 길흉이라는 것이 우선당장 좋으면 길이고 나쁘면 흉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진정 운명의 궁극적인 길흉이라는 것은 죽고 사는 것 이외는 길흉을 논한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운명은 결국 산사람들이 세상과 어우러져 살아가며 처해진 상황에 몸과 정신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역량을 알지 못하는 정신으로 인하여 몸을 해하는 것이 흉입니다.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마음과 정신으로 하여금 몸과 세상을 이지러지게 하는 것인데 이도 역시나 간단하게 표현하면 몸과 정신이 불균형한데서 흉을 자처하기도 합니다.
命은 크게는 우주속에서 나가 있고, 사회속에 나가 있고, 가정속에 나가 있고, 개인속에 나가 있습니다. 대개 事를 알고자 한다는 것은 분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은일이 있다가 어려움이 있는 시절도 있는 것이고 어려움이 있다가도 좋은 것도 있습니다. 불편한 것을 겪어야 편안한 것을 알고 편안해봐야 불편함을 아는 것이 운명입니다.
일간의 억강부약이 내가 좋으면 주변이 힘들고 주변이 좋으면 내가 힘들고 하는 것인데 이를 희기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개인의 욕망에 비중을 둔 발상에 불과합니다.
인비식형의 팔자가 인성은 무력하고 일간과 비견도 쇠하고 식상이 다현하다고 할때 이를 일간 신약이라 하고 운로조차 식재운으로 향하면 많은 시행착오가 예상되는 인생여정입니다.
자신은 진로에 대하여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경험도 많이 쌓아야 하니 세상사에 공과금을 많이 지출해야 하고 부모는 자녀의 뒷바라지로 허리가 휘청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육신은 살아가는 모양에 불과해 무엇이든 적극적이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으나 개인적으로 실속이 없고 작게는 주변을 이롭게 하고자 자신은 소모되는 현상입니다.
이것이 개인사로 보면 세상에 열심히 기여는 하는데 알아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니 이것이 답답하다는 말이고, 가정사로 부모입장에는 쓸데없는 짓만 하니 답답할 뿐일 것입니다.
운명은 개개인이 모여 세상속에 어우러지고 살아가는 것이 질서인데 결국 고객의 편의에 맞춰 事를 논하기도 命을 논하기도 하며 분수에 대한 표현을 하는 것이 명리입니다.
결국 분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겪고 있는 시행착오의 한부분입니다. 이는 시간이 멈추어 있으면 자각하다가도 시간이 가면서 혼돈에 빠지게 하는 것이 運입니다.
시절과 시간은 명석한 자신의 판단에 혼돈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어리석음에 경종을 울려주기도 합니다. 명을 알고자 하는 님들이 자신을 자각하며 아픔도 있고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픔을 알기보다 기쁨을 알기보다 소신있는 자신의 신념을 가져보며 한 순간이라도 깨어져 있는 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을 만나는 것이 행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의지를 갖는 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하거나 흔들리거나 확신이 서지 않는데에서 오는 힌트에 불과하니 상담하는 이로서 결국 불분명한 의지를 바로 세우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명을 몰라도 세울 수 있고 알아도 세울수는 없습니다. 그져 통하지 않으면 만사가 무용하니 믿음으로서 소통하는 것만이 자신의 의지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분수를 자각하지 못하는 혼돈에 무인성자가 인성이 운에서 올때입니다. 인성은 내 마음속에 또 다른 나이기도 한데 이것이 운에서 왔다는 것은 자기를 찾기 시작하는 때가 왔다는 말입니다.
인성이 있는 분들은 내 마음속에 나아닌 나와 늘 타협하며 세상사와 맞서는 것인데 인성이 없던 사람이 운에서 맞았다는 것은 주변여건이나 타인으로 하여금 나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자신은 마치 타인으로 하여금 이용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세월을 많이 죽이신 분이 40대에 인성운이라면 인생을 헛살았다는 회의감이 찾아 오기도 합니다.
인생과 운명을 잘 못산것이 무엇이고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정답은 없습니다. 결국 내 역활이라는 것은 사주원국 팔자에 있는 것이지 시절에 불과한 때는 결국 혼돈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살아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데 뭔가를 자각하고 행해야 한다는 것은 성가시고 부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합니다. 마음은 저짝에 있고 현실은 이짝에 있으니 혼돈이고 어지러움입니다.
이상한 나라에 엘리스가 잠시 다른 세상을 경험하기도 하나 봅니다. 팔자에 없는 것이 온다는 것은 결국은 우선은 혼돈이고 적응하면 좋아지거나 나빠지거나 할 수도 있는데 않하면 결국 허송세월입니다.
아이가 성장하는데 자꾸 불편함을 주는 것은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고, 아이가 성장하는데 편이로움을 주는 것은 세상에 부적응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대개 육신에서 편관이라는 것이 불편함이라 하는데 사람이 키가 크려면 불편함에 길들여져야 합니다. 키가 안크고 안빈낙도하고자 하면 재성이라는 것에 안주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편관이라는 것은 키를 크게 하기도 어려움으로서 극복하고자 하는 인내심과 의지를 길러주는데 비하여 재성이라는 것은 주어진 것에 안분자족하게 하니 난쟁이에 불과합니다.
고통은 이겨내라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의지를 가진 이야 말로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달갑게 받아 들이고 이기고 극복하려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결국 순간에 달콤한 유혹으로 안분자족하는 것과 같고 고통스럽게 힘들게 운명을 인생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당당한 자신감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모지람이고 과정일 뿐입니다. 지혜로움은 한시절 꿈을 위해 살기 보다는 세상속에 존재가치로 해야할 일을 찾고 몫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분수를 모르는 것은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분수를 안다는 것이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모르고 산다는 것이 불행일 수도 있고 알고 산다는 것이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재생살로 살태왕한 분이 문점을 청합니다. 살아가기가 힘들고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식상운에 도착하여 편하게 놀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신호가 들어왔고 그것에 적응되어야 합니다.
신호가 언제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은 시대가 주는 혼돈이고 이미 몸과 마음이 그에 부합하려는 것이 신호이니 보이지 않는 것을 있다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하나이고 정신은 자유로우니 이것이 이미 혼돈이고 분수를 자각하지 못하는 원인입니다. 과정은 명분이고 결과는 늘 실패와 성공으로 나뉘어 지니 이것이 희기인가 봅니다.
이번주 토요일은 세상사에 개개인이 어찌 적응되이 살아가는지 명리로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며 의지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명리를 열어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출처 : 의지를 바로 세우는 명리학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