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간 신약에 대하여 화두를 잡아 봅니다. 세상은 넓고 넓어 알아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에서 행해야 하는 월령용사 전구용신에 매료되다 보니 한 개인의 대항력인 일간에 소홀히 했는데 사회속에 개인은 작은 지부와 같아 소박하기만 하고 개인의 사회적 포부는 거창하여 마치 손안에 쥔 듯도 합니다.
월령은 작게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크게는 사회적인 조건과 같다면, 일간은 모두가 엄마의 다리 사이에서 핏덩이로 나온 애송이(죄송)와 같아 모두가 공평하게 성장하여 가정에서 사회로 나가 일익을 감당하는 개인적 인물의 자질을 보는 조건과도 같아 우선 일간은 모두가 신약이라는 데서 출발선을 그어 봅니다.
물론 시작하기 전에 신약(身弱)이라는 어휘에 대한 정의도 간단히 표현하면 身이라는 것은 몸身이라해서 일간(日干)이나 我를 지칭합니다. 弱이라는 말은 대개 왕쇠강약(旺衰强弱)에서 일간과 관살의 관계에서 剋을 받았을때 弱하다 합니다. 대개 왕쇠가 일차적인 기준이라면 강약은 이미 이차적인 상황입니다.
왕(旺)은 일간이 근(根)과 생(生)을 받아 外에 대항력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고 쇠(衰)는 근(根)과 생(生)의 조건중 하나만 있거나 둘다 없어 없어 外에 대항력이 부족한 능력인데 이것이 2차적으로 재(財)를 克하여 강(强)해지기도 관(官)에 剋받아 약(弱)해질 수도 있는 것이 일간의 자질이기도 합니다.
결국 일간의 왕쇠강약은 상대적인 경쟁력을 보는 것입니다. 분류하여 쪼개고 나누어 보면 다리가 고장인지 팔이 고장인지를 알게 되나 그져 일간의 신약 신왕으로 보면 몸의 컨디션이 어떠하다는 정도에 그치게 되니 아는 것으로만 접근하는데 안주하지 마시고 모르는 것을 궁리하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여튼 하여튼 일간은 모두가 신약하여 한없이 나약한 존재감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해 봅니다. 일간이 근(根)이 있다해도 외부적으로 관살에게 두둘겨 맞는 가운데 맵집이 쌓여질 것이고, 식상으로 쓸데없는 짓이라도 해보아야 경험도 쌓일 것이고, 재성으로 맛을 보아야 맛을 아는 법이니 모두가 신약입니다.
일간이 근(根)이 있어도 신약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치고 받고 싸우지 않고 산전수전 겪어보지 못한 나약함입니다. 삭힌 홍어 맛도 먹어 본 사람이 아는 것이고 이것저것 경험하고 두둘겨 맞으며 맵집을 길러야 하는데 대개 이들은 나 냅둬 이대로가 좋으니 나 건들지 마라며 존중받고 인정받으려 합니다.
대개 부모가 자식을 망치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이곳에 있는데 거친 세파에 찬바람 비바람 폭풍을 맞게 키워야 하는데 반대로 온실속에 화초처럼 보호자라는 명분으로 자식의 根이 되어 수족처럼 손과 발의 노릇을 하고는 이것이 부모 노릇인줄 착각하시기도 하시니 과연 어떠한 선택이 옳을까 싶습니다.
인성의 생(生)이 있어도 신약한 것은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며 노심초사 전전긍긍 학습하고 고민하며 의지할 곳을 찾습니다. 관살이 생하여 보살핌을 받는다면 의지처를 찾는데 성공하기도 하나 식상을 보면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 자기 점검만 하기도 하고 아쉬우면 소일거리 아르바이트로 할 것입니다.
재성을 보면 경제적인 활동으로 의지처를 만들기도 하나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고, 비겁을 보면 스터디 그룹이나 연구, 고민하는 종교집단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결국 인성으로 일간이 신왕해지려면 신왕한 관살의 생이 인성에 이르러야 합니다. 재생관받지 못하거나 부실한 관살의 생은 신왕하기 어렵습니다.
인성만 왕성하고 재생관 받지 못한 관살이 되면 오히려 관설되기 쉬우니 이는 차라리 관살이 없는 것보다 못하여 사회속에 머물러 의지할 곳이 부실하니 떠돌아 다니며 고민하거나 방황해야 합니다. 대개 낙향선비나 강태공으로 낚시하기를 좋아하여 외진 곳에서 세월을 낚거나 풍광따라 여행을 즐기기도 합니다.
인성으로 신약한 분들은 대개 핑계가 많기도 듣자니 그럴듯 하기도 한데 결국 냉정히 보면 세월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상한 나라에 엘리스마냥 돈키호테마냥 겉도는 것에 불과하니 일단 주어진 것에 닥치는데로 적응하는 것이 상책이고 고상하게 우아하게 폼잡지 마시고 소매를 걷어 붙이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출처 : 일간 신약에 대하여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