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이 오행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水는 하늘에 태양(丙火)과 땅인 지구(壬水, 戊土)에 내려준 생명에 근원인 씨앗(壬水,戊土)과도 같습니다. 水火에서 土는 생명이 시작되기도 응결되어 소멸되는 근원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기본적인 존재입니다.
수화의 빛과 어둠은 광명천지와 암흑천지와도 같은데 이러한 낮과 밤이 교차하는 일정한 타이밍과 시간이라는 무토가 생명이 살아 움직이기도 고정되기도 하는 우주만물의 생성원인을 현상적인 주체를 보고 객체적인 관점에서 지혜로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구는 육지가 30%이고 물이 70%로 구성되었고, 사람의 신체도 물이 70%이고 건더기가 30%로 구성되었으니 다시 土水라는 기반에서 火에 의해 지혜와 총명함으로 진화하는 과정같기도 합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수는 오행에서 출발이고 끝이기도 합니다.
타 오행에 배합하기 이전에 水는 土에서 배양되는 시초이기도 합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물의 분자식을 H2O로 표기하는데 이는 수소 2개와 산소 1개가 만나 물의 원소가 성립된다고 합니다. 고전에서는 수소가 하늘에 뭉쳐 대기를 이루고 산소와 만나 응결되면 구름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름은 태양에 열기에 따라 비가 되어 내리기도 합니다. 태초에는 산도 없고 강도 없었는데 수천년 비가 내려 냇물을 흐르며 지축을 변경시키다 보니 산도 생기고 바다도 생기고 육지도 생기고 평지도 생기며 땅의 고저와 높낮이도 생겨지나 봅니다.
생명의 근원인 토수의 배합이 토가 높아 수가 낮으면 가파른 계곡과 같고, 수가 높고 토가 낮으면 완만한 강물이 흐름과도 같습니다. 땅위에 흐르는 물이 있으면 땅밑에서 쏟아 오르는 우물물도 있고, 저짝에 가보니 온천수도 있으니 물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두루뭉술하게 뜬구름 잡는 오행이 십간으로 표현되어지며 계수는 안개와 구름이 되고, 임수는 소나기나 비가 되는것처럼 물상화시키기도 하는데 음양과 오행이라는 기둥과 줄기가 없이 10간의 물상은 귀신이 씨나랏까먹는 소리와 흡사하기도 합니다.
하물며 간지가 만나 12지지로 표현되어지며 자수와 해수가 강물이고 지하수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음양에서 바라본 수인지, 오행에서 바라본 수인지, 10간12지에서 바라본 수인지, 한난조습에서 바라본 수인지를 분별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일장춘몽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 유식한 말로 표현한다면 用적인 관점이냐, 體적인 관점이냐에 대한 순차적인 접근법인데 오늘은 그져 한가로이 오행적인 관점에서의 수가 이러하고 음양적인 관점에서 수가 이러하다를 표현하고자 하는데 순서를 잡지 없다면 모두가 거짓에 불과합니다.
수는 알지도 보지도 말아야 되는 것을 암흑천지에서 보았다고 하니 거짓이고 들었다면 참인것도 같아 보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화는 광명천지에서 보았다니 참이고 불이 난 것을 들었다고 하면 거짓인데 연기를 보고 마치 잘타는 불꽃을 들은것처럼 하기도 합니다.
수는 속내의 꿍꿍이가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화는 꿍꿍이가 표현되어져 나타나기도 합니다. 수는 들을 것을 말하고, 화는 본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데 인간사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들은 것을 보여주기도 보여준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표현이 서툴다 보니 춘하절생은 목화이니 행복이고, 추동절생은 금수이니 불행이라는 것처럼 묘사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양면의 기준을 정하지 않으면 출발이 되지 않는 것이 음양이고 오행이라 부득히 그러하다는 것으로 비유했을 뿐이지 사실이 그러하지는 않습니다.
수가 숨겨졌다는 말은 화가 보여졌으니 수는 숨겨진 것이고, 수는 흐른다는 것은 화가 멈추어 보여 졌으니 수는 흐르는 것입니다. 화가 움직이고 활동한다고 한다면 수는 고정되어 멈추기도 한 것이고, 수가 움직인다고 하면 화는 고정되어 있는 것과 같으니 이처럼 수화의 일체론을 설명합니다.
수화는 하나라고 하면서 둘로 나누는 과정에서 수는 정신력이고 지구력과 같아 마치 인체에서는 피가 심장의 박동에서 대동맥을 따라 모세혈관까지 뻗어 나가고 순환하는 혈류의 흐름과 같습니다. 몸체에서 水는 자윤하게 혈색의 착상을 돕고 정신과 육체의 힘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가 지식을 받아 들여 지혜로움으로 활용되려면 토수의 배합속에 화가 개입되는 것과 같고, 수화속에 토가 개입되면 지식과 지혜를 다시 검증받는 것과 같습니다. 水를 이해하고 안다는 것은 사람의 정신과 이념이 어떻게 쓰고 활용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는 마음이 마음이 연결되는 통로이니 언어의 소통과 같고, 느낌과 느낌을 전달 받고 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가수다를 보니 가수가 감정몰입을 하여 열창을 하니 그 느낌이 관객에게도 전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아는 노래는 감정의 동요가 크고 모르는 노래는 감정의 동요가 덜하다는 것입니다.
水는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에 잔상이기도 하고, 너무나 익숙하여 고정되어 각인되어버린 음률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것은 각색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편곡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오행으로는 금생수입니다. 빠르고 늦은 템포는 크고 작은 소리는 금생수로 소통하는 방법론을 찾습니다.
때로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스며져 들려지는 것이 발라드라면 비오는날 아줌마 마음이 심란할 만도 합니다. 이것은 토수속에 금생수되는 것일수도, 수가 토속에 스며드는 것일수도, 토속에서 수가 솟아나는 것일수도 있으니 강물은 소리가 나지 않고 계곡물은 하염없이 졸졸 소리가 납니다.
계곡에는 바위와 바위를 굽히쳐 부딪혀 흐르는 소리가 있고, 엹은 물에는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있습니다. 금생수는 동심을 일깨우기도 하고, 마음에 잔상을 움직여 닫혀진 마음을 연결하기도 소통하기도 하니 참 신통방통한 금생수입니다.
수가 정신이고 마음이고, 오래가는 지구력이라는 것은, 세월이 간다하여 변하지 않고, 세월이 온다하여 변하지 않는 나만의 고요한 숨결과도 같습니다. 수는 수생목할 수도 있고, 금생수할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 금생수하지도 무조건 수생목도 하지 않으니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수생목이 혼자 신음하는 소리와 같다면 금생수는 함께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것과 같고, 금생수가 아리랑 노래가락처럼 잊어져가는 잔상과 같다면 수생목은 혼자 중얼거려 보는 것과 같습니다. 수가 정신을 교감하고 마음을 연결하고자 하면 화는 춤으로 스탭을 맞추고 손을 마주쳐 화이팅을 외치기도 합니다.
수가 정신과 마음으로 귀결짓는 다면 사람의 생각은 멈추어 있지 않고 늘 움직이고 변화하고 흐르기를 좋아합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은 흐르는데, 흐르다 멈추어 고정되면 정신이 나가기도 정신줄을 놓았으니 치매라 하기도 자패라고도 합니다.
水를 소리로 비유하는 것은 어둠속에 바람소리가 들려지고, 호랑이가 풀섶을 가르는 소리는 들리기도 합니다. 금생수는 바람을 가르는 전광석화같은 칼소리가 바람을 가르는 스스슥 사사삭 획소리와 같고, 이때 토수는 둔탁하게 드럼치는 소리가 꽹가리치는 소리처럼 소음이 되기도 합니다.
소리는 금생수로 시작되는데 정작 들려지는 것은 신생아가 탄생할때 응애하는 수생목으로 들려지는 것과 같아 금생수는 소리가 나는 목젖과 같고, 드럼이나 키타, 피아노와 같은 도구라면 수생목으로 소리가 나서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인데 이처럼 금생수가 수생목으로 소통하고 연결되는 것입니다.
수는 겨울이면 얼음으로 고체가 되어 응결되기도, 봄이되면 만년설이 녹아 계곡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고, 여름이 되면 열기로 기체가 되어 안개나 습을 만들기도 하고, 가을이면 구름과 비가 되어 산천초목에 흡수되기도 하니 일정한 듯 하나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동의보감에는 물의 종류를 간단히 33가지를 분류해 놓았는데 새벽에 우물물에서 길은 물은 정화수라하여 하늘에 정기가 녹아졌으니 보음하고 차를 다려마시고 이 맛은 눈 녹은 물맛이 나기도 합니다. 한천수는 깊은 우물물에서 바로 떠서 먹는 물을 말합니다.
동지 섣달 눈과 얼음이 녹아 있는 물을 납설수라고 하는데 최근에는 현미경으로 보면 눈꽃이 핀 모양이라 해서 육각수라고 하고, 우수절기에 처음으로 내리는 빗물을 그릇에 받으면 춘우수가 되어 정력에 효과가 있다하고, 가을에 이슬을 긁어 모은 추로수는 해독제로는 으뜸이라고 합니다.
한강물처럼 태백산 산골짜기에서 인천앞바다까지 흐르는 물은 천리수라 해서 더러운 것을 씻어내리는데 좋다하고, 거품이 생긴 물을 감란수, 순하게 흐르는 순류수, 급류로 흐르는 급류수 뜨거운 물인 온천물 등 많은 물을 표현하자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간지의 모양이 저런한가를 보자는 의미입니다.
수가 지혜의 원천이라면 결국 사람의 마음씀씀이나 어떠한 생각과 의지를 가지는가는 수를 보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오행상 수를 보는데 시대속에 필요한 지식은 토수의 배합속에 화가 수를 수생목으로 쓰는 것이라면 토수의 배합속에 목생화하는데 수생목은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나 지혜를 전략과 전술로 쓰는 것은 화를 기준한 토수의 배합속에 수생목이라면, 목을 기준한 토수의 배합속에 수생목이 음란한 행위로 나타나는 것은 수생목이 목생화로 연결되지 못하고 시절과 때만 여름을 만났기 때문에 이때의 수는 지식이나 지혜이기보다는 자제하기 힘든 정력이기도 합니다.
금을 기준한 토수의 배합속에 수생목은 정신적 안도감을 가지기 위한 지식이라면 목생화는 몸을 지치게 하여 마음을 안주하려는 지혜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수를 기준한 수생목 목생화는 야망과 포부와 같은 지혜라고 한다면 시대적인 주인의식이 되살아 나기도 하나 봅니다.
수는 자존감이기도 합니다. 자긍심이기도 합니다. 왜 숨을 쉬고 살아가야하는지 이유는 없으나 눈을 뜨고 있으니 알것 같기도, 느껴지니 기분이 나쁘기도 좋기도 하니 수는 심보이고 어떻게 행하고 움직이는지 예측할 수 있을것만 같은 떠올림에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바람결을 보고 수는 배가 고프다 하고, 어떤이는 시를 쓰기도 하고, 어떤이는 몸이 근질거린다고도 하니 그져 세월에 토수의 배합에 담겨져 수생목으로 흘러야 한다니 늘 노코멘트로 일관할 수 있는 특권이었나 봅니다. 이러한 수를 알고자 했으니 민망하고 부끄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