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속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는 방식과 행동에 따르는 의지가 있는데 이를 명리에서는 육신이라는 잣대로 미루어 짐작하고 이해하기 위해 해석하는 방법론으로 상관견관이라는 어휘로 논리(도구, 잣대)를 세워 통용되는 가설적 단어가 있습니다.
여명의 사주에서 상관견관(傷官見官)을 위화백단(爲禍百端)이라 하거나, 월상(月上)상관은 마치 이혼은 따논 단상처럼 표현하여 남자들이 피해야할 여성 1호처럼 친절한 주의사항을 안내하는 것처럼 하는 책이나 온라인에 게시된 글에 우선 용서를 구합니다.
학위를 취득하기 위한 연구논문이나 각종 학술지에 게시된 글들에 진실여부를 따져보기도 해야 겠지만 이를 접하고 일상생활에 활용하는 분들의 객관적 견문도 중요합니다. 모든 일에는 복중에는 화를 숨기고 화중에는 복이 따르는 것이 음양의 이치입니다.
남녀간에 있어 상관견관은 서로 남남인 남녀가 연인이되거나 부부의 연을 맺고 사는 관계설정일 뿐입니다. 이것이 좋고 나쁘고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 생각하기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이라 인간사 의지로 극복되어지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주에 정관은 좋은 길성이라 길신(吉神)이고, 상관은 나쁜 흉성이라 흉신(凶神)이라 하여 길흉(吉凶)을 나누는 방식은 학습을 위한 방법론에 불과합니다. 인간사는 안과 밖이 있고, 너와 내가 존재하는 내외가 있는 것이기에 모두가 필요충분 조건입니다.
상관 아내는 활 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처럼 긴장하고 스스로 급한 것이 아니라 남편을 보자니 서둘러 대하매 약점을 찾고 발견합니다. 만약 장점도 보였다면 재성이 있다는 것이고, 약점을 현실적 상황과 타협하여 합의점을 찾는 것은 정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관은 가만히 있었는데 상관이 먼저 움직인 것입니다. 정관이 먼저 움직여 상관이 움직이는 이치는 없습니다. 창이 만들어지면 방패가 만들어 지고, 방패가 만들어지면 방패를 뚫는 창이 만들어지는 우선 순위가 남녀의 상관견관하는 이치와 흡사합니다.
간단한 논리로 정관은 상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상관은 정관을 이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상관이 정관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은 정관은 어떻하든 상관을 지원하는 겁재를 制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재생관을 장려하는 제도적 안정장치를 하여 혹세무민하는 상관을 고립무원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만약, 상관이 정관을 이기려는 공식을 세워 본다면 정인을 설기한 겁재의 생을 받은 상관이 정관을 요지부동하게 재극인시키는 환경설정을 시키는 방법인데 이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극적인 반전게임과 같아 설록홈즈만 가능합니다.
하나, 대개 겁재의 생을 받은 상관은 우선은 실패하고 성공사례를 모방하여 재도전을 하게되나 인성을 설기하지 않고는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혹여, 비견의 생을 받은 상관은 안타까운 현실에 동조를 해주는 정은 한번은 족하나 두번은 외면할 것입니다.
상관견관하는데 편인은 남편의 약점과 헛점에 실수까지 틀어줬으니 볼모로 잡을 수도 단칼에 짜를 수도 있습니다. 식신은 감정을 추스리고 이성적인 수순과 절차를 밟으려 할 것이고, 편관은 밖에서 잘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있을때 더욱 다정했으면 합니다.
그럼 반대로 상관견관하는데 정관은 변화보다는 태평성대를 유지하기 위해 근면성실하게 일하는 성실한 남편입니다. 이때 정관이 정인을 생하면 상관의 변화를 잠재우고 남편의 권리를 유지하나 만약 불생하면 생존을 위한 의무만 남으니 불편하다 합니다.
정관은 매사 순차적인 절차로 돌다리도 두둘겨 가며 차분하게 합의점을 찾기를 원하여 상관보다는 식신을 원하는데 하필 상관은 매사 서두르고 즉흥적이라 미덥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재성이 있어 남의 이목과 자신의 체면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편인이 있다면 남아 일언 중천금이라 맺은 언약은 어찌할 것이고, 편관이라도 있었다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해도 오늘 한그루에 사과나무를 심는다 가는 길이 가는 길이라 할 것입니다. 비겁은 흔들리고 이탈되는 군심을 어찌 하나로 모을까 고민입니다.
상관견관에서 서로가 하나가 되기 위한 과정이 있고,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과정이 있고, 이별하는 과정이 있는데 이러한 서로간에 입장을 표현해보려 한 것입니다. 상관견관은 좋지 않아서 이혼하고 재생관은 좋아서 결혼하고라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재생관도 이혼하고, 관인상생도 이혼합니다. 상관견관도 결혼하고 이혼합니다. 물론 재생관과 관인상생은 상생으로 만났으니 겉으로는 다정해 보이나 안으로 속썩는 것은 있을 것입니다. 상관견관은 상극으로 만났으니 겉으로는 대립하나 이보다 속편할 수는 없습니다. 일면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이 남녀이고 부부관계입니다.
명리에서 상관견관은 나쁘다는 부정적 선입관을 갖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더구나, 편재격에 재생관하는 형국에서 상관견관이라는 해석은 주변에 이목을 받는 가운데 좀더 각별한 배려를 바라는 것은 아내의 입장이고 남편의 입장은 대의적인 명분을 위해서 가야할 길이 있는데 사사롭게 내키지는 않치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상관견관이라는 육신에 오행을 포함시키지 않은 단순한 해석일 뿐입니다. 오행은 이성적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감성적인 문제와 같아 자꾸 그러한 생각이 떠오르고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는 것인데 그래서 옛 어르신들은 애기 낳아 키워봐야 어른이라 합니다.
남녀관계에서 불편함에 세월이 끝나는 것도 칼로 물을 베는 것 처럼 쉽지만은 않은데 그래도 편해지고자 끝내는 것도 金木이 손쉽게 이혼도장 찍으면 되나, 水火는 시간이 흘러가야 앙금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土水는 이미 정해진 길을 가야할 뿐입니다. 다행히 木土라면 서로가 더 좋은 것을 찾아 떠나지만 앙금은 남을 것입니다.
출처 : 상관견관의 선입견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