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신제살이라는 것은 식신이 살을 制하는 것을 말한다.
양일간이 근으로 왕하고 식신을 생하면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음일간이 근으로 왕하고 식신을 불생하면 살에 대응만 한 것이다.
음일간이 식신은 생으로 어려움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여건에 의한다.
육신으로 식신의 활용은 일간의 근으로 부터 활용되어야 양생하는 것이다.
식신이 일간 근으로 부터 활용되지 못하면 양생하는데 협조하는 것으로 족하다.
식신이라는 길신은 일간의 주체로서 활용되어야 하는데 근이 부실하면
개체로서 활용되고 주체인 일간이 개체로서 식신을 대하니 탈진되는 것이다.
살이라는 것이 일간과 비견을 극한다는 것은 살왕하고 일간과 비견이 쇠한 경우이다.
制하는 것은 길신이 흉신을 대할때 하는 말이고 왕쇠로는 쇠자가 왕자를 대하는 것이다.
극이라는 것은 흉신이 길신을 대할때이고 왕쇠로는 왕자가 쇠자를 대할때 하는 말이다.
일간을 극한다는 대전제는 일단 살왕이다. 그러나 쇠한 殺이 일간을 극하는 경우도 많다.
살이 일간을 극한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살도 근으로 왕하고 재생살되어 객체인 살에 적응해가는 주체인 일간이다.
만약 일간이 근으로 왕하면 이는 殺이라는 객체를 일간이 주체로서 활용하는 것이다.
이때는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깔끔하고 간결하고 샤프함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적절한 필요극은 자기 발전에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재생살 받지 않은 살이라면 괜한 노파심이나 결벽증을 보일 것이다.
재생살되지 않으면 사사로운 구설을 시달리거나 구설에 근원이 될 수 있다.
殺이라는 것은 재생살을 받아야 대외적인 명분도 있고 원인과 결과도 찾을 수 있다.
식신제살을 보려면 살의 동정을 살펴 재생살하고 있는 살인지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식신을 살펴 근으로 부터 활용되는 것인지를 살펴야 식신제살의 이유를 아는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 제살한다는 것은 나 하나 편하고자 여러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살을 천재지변이나 비수, 총과 칼로 비유하는 것은 불현듯 예고없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살이 쇠약한 사람은 상대에게 상대적인 위축감을 들게 하고 상처가 되는 비수 같은 말을
하고는 자신은 청렴결백하고 떳떳하고 당연시 있는 소리 했다하니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살은 아픈 것이다. 찔려도 아프고 들어도 아프고 부딪혀도 아프고 다쳐도 아픈 것이다.
이것을 내가 당하면 재수가 없는 것이고 상대가 다치면 그런가부다 하는 것이 殺인 것이다.
문상 문병을 다니다 보니 殺은 주목하는 것이고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고 각인하는 것이다.
殺은 불편한 것이지만 살을 찌르고 폐부를 찌르듯 기억속에 남는 아픈 징크스와 잔상과도 같다.
殺은 당연시 하며 살기도 하고 당연시 상대에게 상처도 줄 수 있는 것이다.
나보다 예쁘니 못생긴 나는 상처를 받는 것이고 너가 잘났으니 나는 상처를 받는 것이다.
殺이라는 것은 내가 불편하면 상대는 편하고 상대가 불편하면 나는 편하다는 것이다.
대장의식속에 피해의식이 공존한다는 것은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자존감일 것이다.
이를 식신제살한다는 것은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세상에서 스스로 자립하고 성장하도록 도움이 되는 이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지당하다.
殺이라는 것은 무조건 일간을 극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도 아프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정당성을 상대에게 주장할때 받고자 하는 상대는 감당하기 버거울 수 있다.
사춘기 자식을 키우며 일방적으로 강압과 위협으로 학습과 공부만 강요하는 부모의
역활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것이 식신제살이 아닌가 싶다.
출처 : 식신제살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