身弱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인내심이 필요하다.
身衰로 살아가는 삶이란 자애심이 필요하다.
身旺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동기심이 필요하다.
身强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용서심이 필요하다.
귀신이 씨나랏 까먹는 소리다.
신약신강이라는 말을 상기시켜주시는 도반님이 고마울 따름이다.
왕쇠강약은 왕쇠라는 원인에서 강약이라는 결과를 말하는 모양이다.
원인과 결과가 있으면 중간과정이라는 것도 있으니
왕이 약이 될 수도 강이 될수도 있는 것은 과정이다.
쇠가 강이 될 수도 약이 될수도 있는 것도 과정이다.
인간사 무극을 無라 하기도 하고 종교에서는 空이라고도 한다.
이를 학계는 태극문양이 動하여 陰陽으로 說을 전파하기도 한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것이다.
단지 음양이라는 상대적인 관점을 이해하는 정도가 지성인이란다,
이를 술사는 삼태극으로 動하여 황극으로 說을 검증하기도 한다.
단지 황극이라는 상대적인 음양에 영향을 아는 정도가 점쟁이란다.
이또한 귀신이 씨나랏을 까먹는 소리다.
대개 신강약에 대한 기준이 일간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작금에 현실인 모양이다.
그져 육신으로 식재관이 주류면 신약이고 인비면 신왕의 조건이라 하는 모양이다.
그럼 신약이라는 조건은 관살을 감당하지 못하는 일간이라는 말이다.
財多하면 신약이라는 말보다는 일간이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니 身衰에 가깝다.
食多또한 신약이라는 말보다는 일간이 스스로 탈진하는 것이니 身衰한 것이다.
신쇠신약을 싸잡아 그져 신약으로 통칭하여 통변하면,
관살로 신약하면 관살에 부림을 받고 살면 되는 것이다.
부림이라는 말이 혹여 이해가 안될까 설명을 좀더 해본다면 시시때때 하늘에 재앙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때가 되면 몸도 아프기도 하고, 때가 되면 얻어 맞기도 하고, 때가 되어 황당한 일을 겪고 살면 되는 것이다.
관살을 직업이라고 하면 직업을 감당하기 버거우니 과중과로 하고 몸이 부서질때까지 쓰리디 노동하면 된다.
그렇게 저렇게 세상에서 자신을 소모하며 살아가라는 것이 부림을 당하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이 기피하는 것, 힘들어하는 것, 혐오하는 것을 나는 꿋꿋하게 몸으로 받아 들이고 살라는 말이다.
관살이 어떤이는 남편이란다, 남편인지 어떤지는 나는 모르는 말이긴한데 육친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럼 열심히 남편한데 희생하고 살라는 말이다. 남편하나 번듯하라고 나는 고생속에 살라는 말이다.
과연 행복할지 않할지도 모르는 관살로 인한 신약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행복할지 않할지는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팔자에는 반듯이 식재인비라는 육신이 있다.
아니면 적어도 시간이라는 속에서 운명여정에서 식재인비라는 육신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식이 있으면 대립되어 죽을때까지 싸우면 되는 것이다.
식신은 탈진될때 까지 맞서 싸우면 그만인 것이고, 상관은 더럽지만 맞추는 요령을 피울것이다.
재성이 있으면 미운놈 떡하나 더 주랬다고 먹여주고 입여주고 시다바리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고 악법도 법이라고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데 설마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기라면 기고 서라면 서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데 죽이는 무모한 주인은 없을 것이다.
편재로 하면 기특하게 공생하는 법을 알것이고, 정재로 하면 독살시키는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겠다.
신하가 왕에게 양귀비가 좋은 보약이라고 하니 천년만년 살아볼까 냉큼 마시고는,
양귀비에 중독되어 신하에게 구차하게 목매는 왕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관살로 신약하여 정재로 재생관하는 방법은 인간으로서의 상식을 불허하니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관살로 신약하여 인성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가상하지만 가장 미친짓이기도 하다.
인간사 모두가 하루를 살더라도 떳떳하게 살고자 하는 고등동물이니 쿨하게 살려면 식상으로
맞서고 싸우다 작렬이 돌아가시면 역사책에 남을지 칠부책자에 남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요즘은 인터넷에 불쌍한 사연으로 남을수도 있을 것이고, 동정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성으로 관살을 받아들이는 것은 10년 세월 20년세월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가끔 티브에 SOS라는 프로에서 나오는 것처럼 인간으로서 권리를 묵살하고 사는 종살이와 같다.
관살로 신약하여 인성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주인에게 충성스런 강아지와 같다.
10년 머슴살이를 했다는 것도 봤다, 30년 머슴살이를 했다는 것도 봤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다만 소모품으로 살다가는 하나의 동물이니 인권이 여기에 어디있는지 알수가 없다.
이때 운에서 식상운이라도 온모양이다. 모 방송사에서 구제를 해준 것이다.
해제된 것이다. 해방된 것이다. 고통속에서 기쁨이 시작된 것인지 행복시작인지는 모른다.
이를 단지 행복이라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이또한 편인이라는 것은 스스로 안주하며 주인과 나의 관계설정에만 준하니,
어디 네가 죽냐 내가 죽냐 끝까지 갈때까지 가려는 것과 같다.
정인이라는 것은 어찌 되었든 자기 힘을 키워 벗어나고자 힘과 지혜를 키우고자 했을 것이다.
고통의 세월을 인고의 세월을 벗어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처럼 관살로 신약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이해를 돕고자 표현하다 보니 내용이 구차하고 지리멸렬하기만 하다.
분명 원인이 있고, 과정이 있고, 결과가 있는 법인데
인생사가 살다보면
희노애락이 교차하는 것이 사람이다.
어떤때 희하고 어떤때 노하고 어떤때 애하고 어떤때 락한지도 모르고,
신약이라는 어휘로 좋다, 나쁘다를 평하는 것은 단순한 음양적 관점이다.
재성으로 신약한 것은
세상속에 내것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내것을 소유하지 말고 남의집 뒷방에 감나라 콩나라 하고 살라는 것이다.
책에서는 부잣집에 집사라는 말로 표현하고 부잣집에 사는 가난한자라 한 것이다.
유식하게 부옥빈인이라는 말로 멋드러지게 표현이나 하면 지식인이고 교양인인데,
시장바닥에 구르며 살다보니 저런 표현은 부끄럽고 어울리지 않아 못쓰겠다.
어찌되었든 부끄럽고 치졸하여 못쓰겠다.
재성으로 신약한 인물이 살아가는 것은 곧 나의 이야기니 구차하여 생략하고,
시간도 거시기 하니 다음에 기회되면 이어보는 것으로 슬쩍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출처 : 신약으로 살아가기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