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중에 귀신 神자가 붙은 육신은 食神밖에는 없다.
그 많고 많은 단어중에 食(밥식)을 쓰고 神(귀신신)을 썻을까?
재관인이라는 육신은 궁으로는 년월에서 설정된 틀과 같다.
이들만이 정과 편으로 (正偏)이 나누어져 있는 육신들이다.
정재/ 편재/ 정관/ 편관/ 정인/ 편인 재관인은 결국 사회적 설정이다.
나머지 식신/상관/ 비견/ 겁재/는 결과론으로 일간중심으로 가정적 설정이다.
일간중심으로 가정적인 설정이라는 식신/ 상관/ 비견/ 겁재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인 성질을 강하고 인간을 신과 동일시하게 본 것이 食神이다.
인은 관을 부르는 것이고 관은 재를 부르는 것이다.
재는 식을 救하는 법이고 식은 일간을 구하는 법이다.
다시 일간은 인을 부르고 구하니 사람은 저마다 생각을 가지고 산다.
부르고 구한다는 말은 사람은 서로 상생하는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를 인간사는 피동적인 역생을 순행으로 교훈이나 진리인양 묘사하고 산다.
인은 일간을 생하고 일간은 식상을 생하는 것이다.
사람은 배우고 익혀 자질과 능력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식상이 재를 생하여 능력을 발휘하고 재생관으로 능숙하여 검증되라는 말이다.
관성이 인성을 생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준비를 하여 적합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이는 인간사가 만들어 놓은 순행적인 교과서적인 텍스트인 것이다.
자연사는 역생하는 가운데 반응하고 교감하는 것이 우주 질서이다.
인성을 하니 관이 이를 알아주고 관을 하니 여론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재를 하니 노련해지기 시작하고 식을 하니 내가 들어나고 돋보이는 것이다.
똑같은 육신을 순하고 역한다는 미사어구로 지리멸렬하게 표현한 것이다.
식신이라는 것은 자연사적인 관점으로 일간인 나의 주체를 의미한 것이다.
사람은 살아있다는 것이 식신인 것이다. 이는 생명이 살아 숨쉬는 통로이다.
식신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게 인도하는 인도자와 같은 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식신이니 식신을 일러 壽福을 관장한다 하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과 접하며 반응하게 되어 있고 저마다 싫고 좋은 취향이 생기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생각하는 동물이고 의식이 있는 고등동물이라고는 하나
육체를 이기는 정신력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약한 인간이다.
사람은 죽음 앞에는 그 누구도 예외는 없고 죽음을 도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육신도 결국 살아 숨쉬는 인간의 의지를 보는 것이지 죽은자를 보는 것은 아니다.
식신은 인간이 인생의 긴 여정을 살아가게 하는데 건강한 몸체를 지켜주는 것이다.
생명이 탄생하여 죽음으로 끝이 나는 시기까지 몸을 유지시켜 주는 유일한 神이다.
그래서 식신이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 몸과 젊음을 유지시켜주니 늙지 않고
애띤 얼굴이고 애띤 외모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육체를 중시하면 생각하는 고등동물들은 뻔뻔하다 하고 본능적이고 야시하다 한다.
예쁘고 섹시한 모습을 유지한다는 것은 몸이 원하는 것에 충실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미인은 잠꾸러기 이고 나같은 미남은 게으름뱅이 인가 보다.
몸이 원하는 것에 보조를 맞추는 살라는 것이 식신이니 밥귀신인 것이다.
식신의 사촌 상관은 왜 남(겁재)에게 맞추고 사는지 모르겠다.
술을 퍼먹으려면 자신의 체력에 맞추어야지 왜 상대에게 맞추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대학 신입생 레크레이션에 술먹고 저세상 같다는 뉴스에 나오는 것이다.
식신은 철저히 일간을 보호하니 나에게 맞추는 것이고 몸의 반응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러니 神인 것이다. 오감(味, 香, 視,..)에 민감하고 감각이 영민한 것이다.
식신의 가장 큰 적은 편인이다. 사람의 몸을 빌어 태어나서는 神을 조절하려는 자다.
그러니 자해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다운 것이라 주장하고 사는가 보다.
나약한 인간으로 神이 뭔지도 모르고 자처하였으니 제명에는 살지 못할 것이다.
살아가기, 산다는 것은, 운명이라는 것은 결국 몸을 빌어 사는 인간사를 말한다.
정신이 몸을 이긴다는 것은 극기하는 인내심으로 사는 것은 소수의 사람에 불과하다.
제발 알량한 지각으로 존재감을 희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정받고, 자존심, 존경받는 것, 우상화시키는 것은 목숨하고 바꿔야 하는 것이다.
몸이 고장나면 정신도 병이 들고 무력해지는 것이니 사람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어찌 눈에 보이지도 있지도 않은 불확실한 존재감을 사실인듯 하는지 모르겠다.
육신중에 식신운에 살다보니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존재는 나만의 것이 아니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역활이다.
식신은 일간과 더불어 비견의 홀로설때까지 돕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이를 도식하면 냉혹한 세상사에 버림받은 개밥에 도토리신세를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죽음으로 보상하여 영원히 사는길을 택하는 것이 인성이라면
나는 이순간에 한모금의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위안하고 행복하며 살겠다.
우리 오마님 인성격이 정신은 오락가락 하시는데 자손의 마음을 많이도 아프게 하겠다.
인성이 재극인되어 있는 나는 왔다가는 흔적이 없으니 마음을 덜 아프게 하니 다행이다.
결국 사람의 운명은 한줌에 흙이 되는 것인데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되나 싶다.
추기경 어르신은 산자에게 교훈을 주었는지 모르겠으나 여운을 남게 했으니 아픔이다.
쉬운 것을 괜히 어렵게 끌고 가고 있다.
없는 것은 있는 것과 같고 있는 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음양이다.
영원히 사는 것이 좋은 것과 순간 쿨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가는 답은 없다.
다만 저마다 가치관에 의해 목표를 결정하고 살아가니 이것이 바로 用神인 것이다.
오늘 나는 식신이 왜 귀신신자를 붙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함이다.
저마다 자신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이 설자리를 아는 것이 재성이라면
나아갈 길을 아는 것이 관살이고 자신의 실력을 아는 것이 비견일 것이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 일간의 근이라면 형편과 처지를 아는 것이 인성이다.
모두를 동하게 하여 자신의 책임과 본본을 제대로 아는 것이 귀한 식신인 것이다.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식신이다.
출처 : 식신이라는 육신 - blog.daum.net/02461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