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운에 재극인하면 상관견관한다.
정재는 일간(나)중심으로 하면 내 것이다.
정재를 官(세상)중심으로 하면 관에서 보호받으려는 한정되어진 것이다.
정재가 내 것이 되려면 신왕해야 하고 신약하면 그림에 떡인 것이다.
身이 인성으로 신왕하면 재를 制로서 다스리니 재극인 하지 않을 것이다.
身이 根으로 신왕하면 재를 剋으로 다스리니 때가 되면 재극인 할 것이다.
남편이 인성으로 신왕하면 마나님에게 스스로 모범되이 행동하니 존경받아 마땅할 것이다.
남자가 根으로 신왕하면 마누라를 알력(힘)으로 제압하려 하니 늙어지면 재극인 받을 것이다.
정재운에 도착하여 정재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대인일 것이다.
정재운에 도착하여 결국 내 사주안에서 대응력만 가지려는 것이 우리네일 것이다.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것이 범인이고 개구리 올챙이적 기억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運이라는 것은?
나의 운을 보는 것이라면 일간중심이고 사주중심으로 운을 보는 것이다.
운을 중심으로 한다면 재관이고 관중심에서 개인의 사주를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나 중심이라 한다면 일간중심이나 사주중심으로 봐야 한다.
세상 기준이라면 재관중심이고 운을 중심으로 해서 사주를 봐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을 인식한다 하나 결국 내 안에서 운을 맞이하고 사는 미물인 것이다.
재극인하면 상관견관한다.
정재가 정인을 극하니 상관이 살아나 관을 극한다라는 말이다.
행운에서 상극을 보는 것은 사건을 맞춰보기 위함이니 사건중심으로 보기 위해서다.
정재가 와서 정인을 극하면 상관이 살아나 견관까지 한다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정재가 와서 정인을 극하면 상관이 정관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는 이해가 안되나 보다.
고민을 해본다. 왜 이해가 되지 않을까...슬프다, 무엇이 문제일까. 설명이 부족한 것이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시고 계신것 같다.
정재가 정인을 꽝하고 들이 받으니 정인은 작용을 하지 못하고,
制하고 있던 상관이 살아나 냅다 정관을 극하니 망신하는 것이다.
일차적이고 단면적인 육신 해석을 하고 이해를 하고 계신 것이다.
사건의 발달은 정재가 동하여 재극인하고 상관견관까지 한 것이다.
또한 상관견관은 정재라는 화두(세군)에서 나온 것이지 일반적 상관견관은 아니다.
고민을 다시 해보자.
운을 보는 것이다.
운에서 온 정재가 정인만을 해꼬지 하러 온것은 아니다.
일간 중심적인 것이 육신이다. 정재라는 육신도 결국 일간 중심에서 육신이 구분된 것이다.
일간중심에서 구분된 육신 정재가 운에서 와서 너(팔자) 어떻게 할래라고 물었다.
사주팔자는 일간 말고도 나머지 글자가 7자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는 것이 운이다.
만약 根으로 왕한 팔자라면 재를 그냥 취하고자 할 것이다.
인성으로 왕한 팔자는 재극인하고 상관견관하는 것이다.
정재가 운에서 와서 팔자 원국에 있는 정인을 극을 하니 도미노 현상으로
상관이 살아나 정관을 극하니 망신이라는 것은 도미노 현상의 원인은 보지 않고 결과만 본것이다.
원인은 정재가 정인을 극한 것이고 결과는 상관이 정관을 극한 것이다.
덩치크고 山만한 정재가 쬐깐한 정인을 극했다고 정인이 총맞고 죽지는 않는다.
정재가 운에서 왔으니 다만 정인은 반응하는 것이다.
정인이 반응하니 상관이 반응하고 정관도 반응하드라는 관점으로 보면 어떤가 싶다.
정재가 정인에게 반응하라는 것을 통변하고,
상관이 정관에게 반응하라는 것을 통변한 것이다,
정재가 정인을 극하는 것을 흔히들 재극인이라 하는 모양이다.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상황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는 의미다.
정재운이 도착을 하여 정인을 극하게 되는 것이 또 다른 방향으로 표현하면
작금의 현실이 나의 정신적인 안위를 흔들어 놓았으니 현실에 부합된 안위를 찾으라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들 돈을 벌어야 할 것인가 공부를 해야 할것인가라는 비유를 한다.
현실은 배가 고픈데 학처럼 선비처럼 유유자적 책장만 넘긴다고 능사는 아닐 것이다.
돈에 유혹과 현실의 냉혹함에는 변신은 유죄이니 변하지 않는다면 스님일 것이다.
상관은 겁재를 끌고 다니고 정재는 상관을 끌고 다니고 편인은 살을 끌고 다닌다.
혼자 다니기 심심해서 끌고 다니는 것인지는 모르나 정인은 정관을 끌고 다닌다.
이것을 교양있는 말로 正財는 傷官을 救하고 正印은 正官을 救한다하면 이론 같은 모양이다.
하여간 어쨋든간 정재가 상관을 끌고와 재극인하는 것은
나를 현실에 맞추라는 것이고 어여 어서 가만히만 있지 말고 현실과 타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관에게 사랑받고 있는 정인이 재극인을 받았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관의 눈총과 관의 눈길과 관의 혜택과 관의 사랑을 받고자 애를 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재운에 재극인은 나의 변신은 무죄이고 현실에 맞춰 변화에 편승하라는 신호인 것이다.
그럼 정인은 총맞고 죽은 액션은 오버이고 얼렁 정관이라도 취하고자 잔머리를 쓸 것이다.
그래서 상관견관은 오버이고 결국 관을 가지기 위하여 자신을 낮은 곳으로 임하게 하니
거시기 하는 것이다. 거시기는 관의 아래에 들어가 시중들고 참모하고 안주하겠다는 말이다.
이때에 상관견관은 정관을 쳐부수자 공산당이 아니라 공산당 사촌의 끄나풀이라도 잡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상관견관으로 관에 마음에 들고자 하고 관을 가지고 하는 정인의 마음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정재로 인하여 정인이 극맞아 상관견관하는 것이 관을 해꼬지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의 필요성이 간절하여 의탁자나 주인을 그리고 나를 알아줄 남자가 필요한 여자인 것이다.
이 분한 마음 이 원통한 마음을 알아주는 남자는 아마도 참으로 실속을 없을 것이다.
속절없는 것에 매달려 사경을 헤메이는 밤무대의 무희가 그러하고 몸파는 여심이 그러한 것이다.
정재가 재극인하면 상관견관하는 것이다.
이때 상관견관은 남자에게 해꼬지 하는 것이 아니라 확정받고 간택받으려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여인이 그 순간 만큼은 순정을 보이려는 순수함이다.
이를 자칫 상관견관으로 남자를 무시하는 것이라는 판단을 하시면 곤란할 것이다.
정재는 저리도 안가고 이리도 안가고 딱 그만만 하니 중간을 유지하는 놈이다.
노태우전대통령님도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신 분이다.
보통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관에게 보호받고 지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나를 낮추고 시중을 드는 여인이 이와 같고 주인을 잘 만나려는 회사원이 이와 같다.
상관견관도 설명을 해야 하는지 시간도 그러하고 난감하기만 하다.
정재가 정인을 꼬집으니 상관이 정관을 극하여 반응하드라.
정인이 꼬집였으니 얼마나 아플까.
어찌되었든 아픔을 참고 견디며 상관견관이라도 하여 살고자 할 것이다.
이때 관을 묵사발을 낸다면 이는 자살행위인것인데 이런 무식한 머리를 사람은 돌리지 않는다.
상관견관은 거래인 것이다. 관을 돈으로 현혹하고, 눈으로 현혹시키고 물건으로 현혹하고,
푹패인 가슴과 배꼼티와 짧은 미니스커트와 쭉 찟어진 원피스와 망사 스타킹인지 몬지 하여간
돈이 있으면 돈으로 할 것이고 없으면 아무것이나 하여간 거시기로 관을 유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튼 정재운에 재극인하고 상관견관은 거시기다~!
거시기를 이해하면 향후 이런 테마로 연결되는 상극에 대해 궁리해주셨으면 한다.
상관견관하면 쟁재하는 것도 그러하고,
쟁재하면 도식하는 것도 그러하고,
도식하면 살이 냅다 일간과 비견을 징벌하고 하여간 등등
여튼 일차적인 육신간명이 이차로 넘어가며 변화하는 것이
바로 인간사의 애환이고 체험 삶의현장이다.
궁리만이 이해의 폭을 넓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