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사람 읽는 사람 배려도 하지 않고 그놈에 살아가기를 징그럽게 쓰고 있다.
좀 그럴듯 하게 포장좀하지 사는 말을 하려니 죄송하다는 생각이 앞서서 이다.
오늘 일진이 을해일진이고 지금 시간이 9시니 병술시가 되나보다.
결국 내 말을 하는 일진이고 시간이니 한심한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고자 한다.
운명을 아는 역학이라는 테마를 걸고 현직 술사로 일한지도 많은 시간이 흘럿다.
운명을 알긴 무얼 안다고 함부로 그런 말을 인용했는지 언어의 남용이고 남발이다.
운명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결국 운명의 울타리에서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고 사람답게 살 권리에 대해서 잠시의 행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상담하는 시간과 강의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고 멈추어 있는 시간이 공허하다.
비는 시간은 이렇게 글이라도 쓰면서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후일을 기약하기가 힘들다.
글을 쓰면서 몰입하고 스스로에 대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오기인 것도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준점은 있어야 하기에 잊을 것은 잊고 비울 것을 비워내야 채워지는 법이다.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겠다. 그져 어떤 화두를 던지고 글을 쓰는 순간에 행복을
즐기고 싶을 뿐이고 인간사가 이렇치 저렇치 스스로 안위하고 달래는 시간으로 마음을 달랜다.
식신운에 살아가기라는 제목을 걸고 무슨 말을 쓸지는 나도 모른다.
식신운이 오면 일간이 생해야 하는 육신이고 재성을 생하는 육신이다.
일간중심에서 식신이라는 육신을 정해진 것이고 이것이 운으로 하여 식신운이 온것이다.
일간은 식신을 생할지 생하지 않을지는 차선이다. 재성을 생할지 불생할지는 차선이다.
세운을 가지고 상생논리를 편다는 것은 마음이 착한 것인지 미련한 것인지 알수는 없다.
그렇다고 상극논리를 편다는 것은 꽤나 성격이 급한 듯도 하고 잘난척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상생상극으로 하여 생화극제를 다 봐야 하는 운보기가 말은 쉬우나 보기는 어렵고,
이해한다는 것은 많은 세월이 쌓여져야 조금씩 보이는 것인데 이를 말하려니 답답하다.
글은 나도 보고 너도 보는 것이라 보는 사람을 고려하기는 해야 하는데 납득할 만한
설명도 필요한 법인데 어차피 모른다고 하면 속이 편한데 아는 척은 했으니 글은 써야 한다.
기축년 운세가 정화일간에게는 식신운인데 주변이 온통 식신인 것이다.
주변이 온통 식신이라는 것이 모든 코드가 여기에 주안점이 되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식신을 일간이 생한다는 것은 나를 표현하고 나를 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식신에서 일간은 나의 외형과 형체를 유지하는데 힘쓰라는 것이다.
일간이 식신을 생한다는 것은 나의 모양을 관에 적합하도록 유지하라는 말이다.
살에 침범에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고 바르게 모양을 유지하고 살라는 말이다.
살에 침범에 10층에서 떨어져 메주모양처럼 찌그러지지 말고 모양을 갖추라는 말이다.
사회적 관점에서는 꼴좀 보자는 것이니 요구하는 것이고 적합한 놈인지를 살피는 운이다.
일간중심에서는 내가 하기 싫은 짓은 하기 싫고 내가 하고 싶은 짓으로 그들의 요구에 부흥하는 것이다.
만약 일간이 根이 무력하면 무조건 그들의 요구에 적합한 자신의 꼴을 보여야 하니 버거울 수 있고
일간이 根이 있다면 내 꼴을 상대에게 적합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니 속이 시원할 수 있겠다.
내 꼬라지가 根이 무력한 자가 칼국수 전문점을 한다면 고객이 짜장면 해달라고 요구하고
볶은 밥을 요구하는데 나는 칼국수만 한다고 우기는 것은 모지람이고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객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요구에 따를만 해서 권했는데 않해줬으니 서운한 것이다.
서운한 것은 일시적이고 기분도 나쁘고 상대의 변심에 배신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식신운은 일간에게 根旺한지를 묻는 것이다.
근왕하지 않으면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에게 중심없는 인간으로 서운하게 할 것이다.
탈진될때까지 열심히 주변사람에게 맞추면 잘 살고 그렇지 않으면 못살고 원망을 들을 것이다.
만약 근왕하면 숨겨진 실력까지 보여줬으니 보면 볼수록 진국이라 쓸만한 사람으로 다시 보일 것이다.
根이라는 것은 일간 근인데 과연 정화일간이 근을 제대로 활용하는지 아니러니 한 것이다.
음일간은 근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성으로 식신운을 조절하려는 것으로 잔머릴 쓸것이다.
양일간은 생하는 것으로 근으로 하여 생하는 것이 스스로 식신을 행하여 재성에 이르러고 할 것이다.
음일간은 불생하는 것으로 근으로 하여 생하기 보다는 식신으로 하여금 본신을 유지하는데 급급하고
오히려 인성으로 하여금 식신운을 대하려하니 자기 포장과 방어에 전전긍긍하려 할 것이다.
음양간의 기준점을 가지고 식신을 활용하는 것이 출발점이 다름은 많은 차이가 있다.
많은 차이<-이런말 정말 싫은데 양이 양을 생하면 생하는 것이고 음이 음을 생하면 생하는 것이다.
양일간이 식신을 생하면 재성이 있던 없던 재성에 이르게 되니 함께하는 것이고,
음일간이 식신을 생하면 재성이 있으면 생하는 척 하는 것이고 없으면 재성에 이르지는 못한다.
음일간은 식신을 생할 의지가 없는데 식신운을 보았으니 식신입장에서는 생으로 하여 재로가고,
음일간은 인성이 생하면 식상으로 행하고 없으면 생하지 않고 본신을 지키려 할 것이다.
根으로 음일간이 旺하다 해도 식신을 생할지 불생할지는 변수는 염두해야 할 것이다.
10간 12지지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으니 육신을 말하다 음양이나 오행을 말하면 한정이 없다.
육신으로 식신운은 여튼 그러하다는 말이다.
음으로 식신운은 殺이 있다면 제살을 잘 할 수도 있다.
일간이 식신생으로 하여 殺을 制하면 나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나
음일간이 과연 스스로 식신을 생하여 殺을 制하는지는 말이 되지 않으나 그래도 그는 했다 할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그러하다 주변여건이 나에게 유리하게 들어와서 그때 바른 선택만 한것이지 많은 세월
스스로 노력하지는 않은 것인데 호기로 인한 선택으로 자기는 노력했다면 그런가 보다 할 것이다.
인간사는 스스로 알고도 행하고 모르고도 행하고 사는 것이다.
아는 것은 氣이고 모르는 것은 行인 것이다.
神은 철학과 사상이 개입된 것이고 用은 살아 남기 위한 임시변통과도 같은 처세술인데,
用과 神을 用神이라 하여 싸잡고 무엇이 用인지 무엇이 神인지 분별력이 없다면 곤란하다.
식신운이라는 것이 용인지 체인지 나는 모른다.
그래도 굳이 용이나 체중에 고르라면 체이고 사주에 반응하는 것이 용인 것이다.
체가 있으면 용이 움직이는 것이고 용이 움직인 것인지 용신이 반응한 것이 다름이 운명이다.
운이 좋다 나쁘다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기라는 것은 살아가는 모양을 말하고자 함이다.
한해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고 한해 한해 많은 일들을 겪고 살아가는 것을 보고자 하고
우리네 인간사는 과연 어떻게 한해 한해 반응하고 살아가는지 이해하고 알고자 하는 것이다.
가끔 종살격이 어쩌니 종재격이 어쩌니 초년 관살운에 좋았으니 관살운이 용신이 아니냐고 하는
쪽지나 메일을 받을때 간단히 답변할 수 있는 논제가 아닌데 쉽게 질의를 하시는 분이 많다.
대답을 않하자니 서운하다 할 것이고 하자니 어디서 부터 설명을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는 않은데 질의를 이해시키고자 하면 장고의 세월을 보내야 하고
나 바쁜 마음에 어설프게 답변하면 우끼고 있네라는 비아냥이 날아오고 지리멸렬한 술사로 낙인받고
싶지는 않았는지 전전긍긍 궁색한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구차하게 살고자 用쓰는 것이 부끄럽다.
질의한 것이 체라면 답변이 용인데 체에 용이 반응하면 되는데 명쾌하면 시원은 한데 거짓말이다.
체에 용이 반응하는 것으로 함께하면 그만인데 식신운이라는 것은 양심을 속이지는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 상대는 속이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속이기 어려운 법이다.
식신이라는 것은 자기가 원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하는 것은 관중심적인 발상이다.
마음이 가지 않는 것에 行하지 못한다는 일간중심적인 발상이다.
마음이 가야 몸도 가고 몸도 가야 마음도 가고 이것이 같다 여기면 같은 것이고,
틀리다 여기면 틀린 것이니 감정이라는 것과 이성이라는 것에 아픔을 겪어보지 않고는 모를 것이다.
우리는 이성적으로는 이해한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불편한 일들은 무수히 많다.
감정적으로는 좋은데 이성적으로는 좋아해서는 안되는 일도 살다보면 무수히 많은 것이다.
유부남 유부녀가 이성적으로는 바람을 피면 안된다는 것을 충분히 잘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러나 감성적으로는 좋은 것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성적으로 판단해서는 명분이 없고 구실이 없고
감정적으로는 끌리니 나약한 인간은 스스로 자기 합리화와 타협을 이끌어 무모한 선택속에 살아간다.
식신운에 애욕과 본능이 살아나는 것은 결국 이성보다는 본능에 충실하고자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재관인운에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라는 허울에 소외되는 기분에 기분이 꿀꿀할 수 있고 기쁠수도 있다.
식신운이라는 것은 아침에 의식이 깨어나니 일어나고 배가 고프니 밥을 먹고 졸리우니 자고
먹고 자고 싸고 편하게 살아가라는 운인데 보는이가 그런지 상대가 그런지는 상대성일 것이다.
식신은 근에서 부터 출발을 하는 것이니 근왕하여 식신운이면 편의와 안락에 이르려는 것이고,
근쇠하면 주변의 편의와 안락에 동조하고 살아가야 하니 결국 탈진할까 염려스러운 것이다.
힘든자가 있어야 편안한 자도 있으니 세상은 공평한 것이다. 이런 공평한 음양 논리를
혹여 힘든자를 동정한다거나 편안한자를 선망하려 한다면 불공평을 말하는 보통사람인 것이고,
공평하다 여기면 스스로 해야할 일을 아는 자이니 음양화평지인에 이르려는 귀신인 것이다.
귀신은 귀신답게 말하고 인간은 인간답게 말해야 하는데 귀인인지 사람인지 알수없는 것이
이묵이 같은 점쟁이니 점쟁이는 영원히 귀신도 사람도 아닌 것이 세상을 우롱하려는 자이다.
내가 편하고자 상대를 힘들게 하고 상대를 편하게 하고자 내가 힘들어야 하는 것이 식신운인데
부처님 말씀에 사람은 알고도 죄를 짓고 모르고도 죄를 짓는데 인간사는 아는 죄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制하는 삶은 행복이라면 剋하는 삶은 불행의 시작이다.
미완성인 인간이 완전해지려는 것이 制라고 한다면 자신이 완전하기 위해 희생양은 필요하다.
성공하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것이 역사이고 양지에 사는 인간사인데 이것을 쫓지 않으려는 것도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