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림(易林)의 신비
내가 박 선생님께 명리를 공부하던 시절, 한가지 의아하게 생각했던 일이 있었다. 가끔씩 혼자
사주를 검토해 보실 때, 금고에서 옛날 책 한권을 꺼내서 들여다 보시며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이었다. 그 책은 표지가 초록색 비단으로 정성스레 싸여 있었고, 안에는 작은 붓글씨로 한자가
촘촘히 적혀 있었다. 언제 찍어낸 판본인지는 모르지만, 누렇게 바랜 색상과 양 옆의 책장이
너덜너덜하게 닳은 것이 한눈에 세월의 풍파를 적잖이 헤쳐 왔음직하게 보였다.
선생님께서는 그 책을 한참 들여다 보시다가 중요한 부분은 다른 곳에 옳겨 적기도 하시고,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서 책장 사이에 끼워넣기도 하셨다. 그리고 독서가 끝나면 여지없이 튼튼한 금고
안에 깊숙이 넣어 두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 기회가 있었다. 선생님과 명리에 대해 토의하던 중,
그 책을 꺼내시더니 몇 구절을 인용해서 말씀 하시던 때였다. 선생님을 급히 찾는 전화가 온 것
이었는데, 전화를 받으로 마루로 가신 사이, 나는 그 책을 들취 볼 수 있었다. 그 책은 중국 청나라 때
간행된 사고전서(四庫全書) 중 자부(子部)에 수록된 「초씨역림」(蕉氏易林)이란 책이었다.
그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중국 서점을 모조리 뒤져서 마침내 초씨역림을 손에 놓을 수 있었다.
학인(學人)에게 있어서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며칠간 밤을 새워
「초씨역림」을 읽으며 새로운 세게가 열리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
「초씨역림」은 중국 전한말(前漢末)에 초연수(蕉延壽)가 찬술한 최고의 역서로, 다른 역서와 달리
주역 64괘의 원괘(原卦)에 다시 64괘를 곱한 총 4,096괘로 되어 있다. 괘사는 역경의 원리에 입각한
정확한 통변을 경사(經辭)의 내용을 인용하여 간략히 서술하고 있는데, 문장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놀라울만치 정확한 적중률울 보인다.
얼마쯤 지나서 선생님께 「초씨역림」에 관해 여쭤보았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초씨역림」을
금고 속에서 꺼내 주시며 가져가서 보라는 말씀과 동시에 「초씨역림」은 신비한 책이니 함부로
타인에게 전하지 말라는 당부가 계셨다.
「초씨역림」에 대한 공부가 어느 정도 진척되고 나면서, 실로 놀라운 효용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1987년 혼란한 정국을 주변 사람들과 걱정하다가, 문득 대통령 부부에 대해 「초씨역림」에서 얻은
점사(占辭)를 말했던 적이 있었다. '재분망천 불견성진 고소실대 복도장외'(載盆望天 不見星辰
顧小失大 福逃牆外 : 동이를 이고 하늘을 바라보니 별이 보이지 않는다. 작은 것을 돌아보다 큰 것을
잃으니 복이 담 밖으로 달아난다.)
뒷날 대통령 부부가 백담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중의 하나가 점사의
정확성에 감탄하며 「초씨역림」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내가 지니고 있는 여러 판본 중에 하나를
무심결에 꺼내 주었다. 그런데 며칠 뒤 그 사람이 팔에 붕대를 감고 찾아온 것이 아닌가?
책을 복사해서 집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서 팔을 다치고, 빌겨준 책과 복사한 종이는 한강에
빠져버렸거나 도로변에 흩어졌다고 했다.
몇달이 지나서 그 사람이 한 묶음의 원고 뭉치를 들고 다시 나를 찾아왔다. 중국서점에서 「초씨역림」
을 구해 번역을 진행 중인데, 몇몇 부분의 해석이 어려우니 내게 감수를 부탁한다고 했다. 그제서야
나는 박 선생님께서 하신 당부의 말씀을 기억해내곤 정중히 거절하며 「초씨역림」이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초씨역림은 신비한 책이니, 좋지 못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오해려 해악이 될 것이니, 차라리
번역하지 않은 것만 못할 것이요."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을 비서(秘書)로 사장(死藏)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제가 또 다치는 한이 있어도 세상에 널리 알려 전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끝끝내 고집을 세우며 발걸음을 돌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 불안한 마음이 가슴에
감돌았다. 얼마 후 번역 일에 정열을 쏟던 그는 과로에 의해서였는지 아니면 진정 「초씨역림」의
신비 때문이었는지,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번역 일을 끝내 마무리짓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중국의 전설적인 명의 화타(華陀)가 조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화타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던 오압옥(吳押獄)이란 사람에게 필생의 저서 「청랑서」를 전하며, 꼭 후세에 자신의
의술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화타가 죽은 뒤 오배압은 화타를 정중히 장사지내고 「청랑서」를
집으로 가져와 탐독하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부인이 마당에서 무언가를 태우고 있기에 가보니,
바로 화타의 저서가 아닌가! 깜짝 놀라 불을 끄고 부인을 꾸짖으니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익혀서 화타 선생같이 신묘한 의술을 터득하더라도 필경 그처럼 옥에 갇혀 죽게 될 것이니,
이것을 배워 무엇하시겠습니까?" 훗날 어떤 이는 이 일을 두고 아내의 지혜를 칭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여자의 좁은 생각이 화타의 대를 끊었음을 탄식하기도 했다.
그러면 절세(絶世)의 기서(奇書) 「초씨역림」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하는가 사장시켜야 옳은가?
지금도 머리맡에 놓은 「초씨역림」의 완성되지 못한 번역 원고를 들추며, 화타와 오압옥의 부인
그리고 오래 전 세상을 버린 친구 생각에 잠긴다.
노석 류충엽
출처 : 역림(易林)의 신비 - cafe.daum.net/dur6f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