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기도용죄(天機盜用罪)
얼마 전 미국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무단으로 도용한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냈다는 기사를 봤다. 이제 우리는 유형의 물질 뿐만 아니라 지식 같은
무형의 것들도 엄연한 재산으로 인정하여, 그 소유권자의 허락없이 사용할 경우 범죄가 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잇는 것이다. 남의 노래 몇 소절을 베껴내어도 표절이라고 하여 가요계에서
내몰린다.
하물며 하늘의 이치. 즉 천지 조화를 몰래 훔쳐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무사할 리 없다.
이를 천기누설이라고 하는데 이것에도 경중(經重)이 따로 있다.물론 술객들이 천기를 누설하는
것은 실정법 위반사항은 아니다. 천기를 누설했다고 해서 구속이 된다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은
없다. 그래서 이것은 천기 도용 경범(經犯)에 속한다.
그러면 천기도용죄(天機盜用罪)의 중범(重犯)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 천기(天機)라는 말을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천지 조화의 기밀'이라고 나와 있다. 기밀이란 말 그대로 알려져서는 안 될
중요한 비밀을 일컫는데, 다른 것도 아닌 하늘의 기밀을 바깥으로 새나가게 하는 천기누설....
그것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에 중범으로써 벌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기밀에도
엄연히 급수가 있는 법, 누설해도 괜찮은 것과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누설하지 말아야 할 기밀을 누설하는 것이 천기도용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가령, 일기 예보 같은 것은 천기누설에 해당되지만 천기도용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내일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불겠다는 것은 하늘의 기운을 미리 세상에 알려줘서 모든 중생들에게 고루 혜택을
주는 것이므로 굳이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천기도용죄에 해당
될까?
거의 50여년 전의 일이다. 나의 스승이신 도계 선생님께서 충북 옥천에 있는 육영수 여사의 친정
집에 머무신 적이 있었다. 당시 선생님은 여학교 세라복을 입은 육 여사의 사주를 보고 몇 살이
되면 국모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하셨다 한다. 이후 육 여사와 도계 선생님의 친분은 육 여사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되어 왔는데, 그러한 두 분의 밀접한 인연으로 미루어 보면 박정희 장군
과의 궁합도 선생님이 봐 주셨을 것이고, 심지어 5.16쿠데타 택일까지도 도계 선생님 작품이라고
짐작된다.
이 대목에서 성질 급한 독자들은 대뜸 무슨 근거로 그런 허황된 소리를 하느냐고 언성을 높일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추측만이 아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가설이 성립
될 수 있을까?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장군이 한강을 건너오던 때는 신축년 계사월 기유일 병인시이다.
이것을 가지고 박정희 장군의 사맹격(四孟格)에 맞추어 보면, 왕상휴수(旺相休囚)는 물론 생기
복덕이 제대로 일치한다. 이것은 대가(大家)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큰 마음먹고 선생님께 질문하기로 했다. 5월 16일의 일진과 박정희
장군의 사주와의 일치를 말하면서, 혹시 선생님께서 '쿠데타' 날짜를 택일하신 것 아니냐고 여쭈어
봤더니, 선생님께서는 "자네는 어찌 그리 경망스러운가?"라고 하며 노발대발 성을 내시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선생님의 진노는 대단하셨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나타낸다고 했던가. 나는
자리를 물러나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이 택일하신 것이 틀림없다고....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도계 선생님과 육 여사의 친분은 계속 이어져서, 매년 정초가 되면 선생님은 꼭 서울에
올라가 그들의 운세를 봐주고 상담역을 해 주시곤 하셨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정초가 되어도 선생님은 서울에 올라가실 생각을 하시지 않는 것이었다.
왜 서울에 올라가지 않으시냐고 묻자, "뭐 서울에 갈 일도 없고..."하시는 것이었다.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저격 당하던 바로 그 해였다. 아마도 더 이상 천기누설을 하면 안 되겠다고 판단
하셨음이리라.
무정세월 30여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그 제자에게 또 다시 천기누설을 강요한다. 아무개 사주를
아시나요? 아무개 부인이 다닌다면서요? 경제가 망하건, 한보파동에 동네 강아지까지 웃건 말건
이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들의 지속적인 영화 뿐이다. 야사에
의하면 세조가 흉계를 꾸미던 시절, 권람과 한명회의 아낙네들은 장안의 이름난 술객 홍계관을 찾아 다니며 거사의 성공 여부를 물었다고 한다.
세정(世情)은 변해도 인정(人情)은 불변인지, 지금도 정권이 바뀔 때면 술객을 찾는 사모님들이
여전하다. 권람이나 한명회의 부인들처럼 권력의 향방을 묻는 개기름 흐르는 사모님들은 아무도
없는 새벽이나 밤 늦은 시간에 은밀한 독대를 원한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일까? 나 역시 선생님처럼 '인부지 신부지(人不知 神不知)- 사람도 모르고 귀신도
모른다'를 되뇌어 들려준다. 그러면 그들은 다 빨아먹은 개뼉다귀를 다시 개에게 던져주 듯 빳빳한
세종대왕 몇 장을 던져 놓고 돌아서는데, 그들의 뒷 모습을 보며 천기도용죄를 조용히 웅얼거려본다.
노석 류충엽
출처 : 천기도용죄(天機盜用罪) - cafe.daum.net/dur6f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