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亥]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집집마다 돼지를 길렀고 어쩌다 돼지꿈을 꾸면 재수 좋은 꿈을 꾸었다고 기뻐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돼지가 새끼들을 품에 안고 젖을 빨리는 사진을 걸어 놓고 일이 잘되기를 빌기도 했다. 상점에는 새해 첫 돼지날[上亥日]에 문을 열면 한해 동안 장사가 잘된다는 속신도 있다.
죽어서도 돼지혈(穴)에 묘를 쓰면 부자가 된다고 믿어왔다.이처럼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돼지를 부(富)와 복(福)의 상징으로, 돼지꿈을 재운(財運)과 행운(幸運)의 상징으로 여겨 왔다. 많은 사람들이 돼지해를 맞으면서 무언가 행운과 재운이 따를 것으로 믿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돼지는 기후, 풍토에 대한 적응력이 강하여 전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돼지는 그 조상인 멧돼지 때부터 후각이 발달되어서 사료 사육자 새끼 대소변 등을 구별할 수 있다.
코끝에는 연골판이 있고 촉각이 발달되어 있어서 땅을 파면서 풀뿌리. 벌레 등 먹이를 얻는 데 편리하게 되어 있다. 특히 멧돼지는 '먹성'과 '야성'의 화신으로 냄새 맡는 데는 귀신이다. 몇 리 밖 엽총의 화약 냄새까지 식별해 낼 정도이다. 멧돼지의 성질은[猪突的]이란 말이 있듯이 대담하고 난폭하고 영리하기가 여우 이상이다.
돼지우리 주변은 항상 습기가 차고 더러운데, 이것은 돼지의 땀샘이 발달하지 못하여 체내의 모든 수분이 소변으로 배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설 장소를 따로 만들어 주면 배설물이 있는 곳의 냄새를 맡고 그 장소에서만 배설하며, 누울 곳은 항상 깨끗하게 유지한다. 보통 돼지우리는 지저분한 것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지만 실은 소나 닭보다 더 깨끗한 동물이다.
석기 시대 동물상(動物相), 조개더미[貝塚], 토우(土偶), 토기(土器) 등 고고 출토 유물에서 돼지의 조상 격인 멧돼지 뼈와 이빨이 다수 출토되고 있고, 표현된 것으로 보아 가축으로 길들여지기 이전에 야생의 멧돼지가 한반도 전역에 자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돼지의 사육은 이러한 고고 자료와 {三國志 魏志 東夷傳}등의 기록으로 보아 약 2천년 전에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三國史記} 琉璃王, 山上王 편이나, {三國遺事} 射琴匣조, {高麗史} 高麗世系편에서 돼지는 신통력(神通力)을 지닌 동물로 신성시하였다. 돼지는 신에게 바쳐지는 제물(祭物)임과 동시에 국도(國都)를 정해 주는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전해진다. 즉, 돼지는 예언자, 길잡이 구실을 하여 명당(明堂)을 점지해 주거나, 왕의 후사(後嗣)를 낳아 줄 왕비를 알려주었고, 왕을 위기에서 모면하게 해주었다.
돼지는 일찍부터 제전(祭典)의 희생(犧牲)으로 바쳐졌다. 고구려의 교시(郊豕), 삼월 삼일 하늘과 산천의 제사, 12월 납일의 제사, 동제와 각종 굿거리, 고사(告祀)의 제물로 의례껏 돼지 머리가 가장 중요한 '제물'로 모셔진다. 하늘과 땅에 제사지낼 때 쓰는 희생물로 돼지는 매우 신성한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신이(神異)한 예언적 행위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돼지 같은 녀석' 이렇게 욕을 하면서도 한국인은 꿈에 본 돼지는 대단한 귀물(貴物)로 친다. 만일 돼지에 개마저 덧붙이면 그 욕은 사뭇 상소리가 되는데도 돼지꿈은 용꿈과 같은 항렬이다. 한국인이 갖는 동물 꿈 가운데서 돼지는 용과 더불어 최상의 길조(吉兆)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돼지꿈과 용꿈은 길몽의 쌍벽이다. 돼지꿈은 부의 상징이다. 집안에 모시고 믿음을 바치던 '업신'이 현실의 재물신(財物神)이라면, 돼지는 꿈속의 재물이다. 꿈풀이 책을 뒤져보면 '돼지는 재물, 횡재, 소식, 벼슬, 복권당첨, 명예를 상징한다'고 되어 있다. 다음은 길몽의 돼지꿈이다.
-. 돼지를 붙잡아 매어 두었다.(호흡이 맞는 사람이 집에 들어온다)
-. 돼지 목을 누르고 다리를 부러뜨린다.(경쟁, 재판에서 이긴다)
-. 똥통에 빠진 돼지를 막대기로 건진다.(재수 있는 꿈이다)
-. 남의 집돼지를 자기 집으로 끌고 온다.(복권 당첨, 결혼, 계약 등으로 사업, 생활이 개선되고 불행이 극복된다)
-. 돼지를 실어다가 우리에 몰아 넣는다.(재물이나 돈이 생긴다)
-. 토실토실한 돼지를 쓰다듬는다.(태몽이며 부자가 될 자식을 낳는다)
-. 새끼를 낳는 것을 보거나 쓰다듬는다.(태몽이다)
-. 돼지가 따라오거나 끌어안는다.(명예가 올라가거나 입신 양명한다)
돼지 그림이나 돼지 코는 번창의 상징이나 부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장사꾼들에게는 '정월 상해일에 장사를 시작하면 좋다'는 속신이 있다. 이처럼 돼지가 재물과 관련된 것은, 돼지가 가계의 기본적인 재원(財源)이었고, 그 한자의 '돈(豚)'이 '돈(金)과 음이 같은 데에 연유한다. 장사하는 집에서는 곧잘 돼지 그림을 문설주 위에 그려 붙였다. 이것은 돼지가 한 배에 여러 마리씩 새끼를 낳고, 잘 먹고 잘 자라는 강한 번식력 때문이었다. 즉,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침 흘릴 시기가 지나도 침을 흘리는 아이의 목에 돼지 코를 잘라 걸어 주면 침을 흘리지 않는다고 부적처럼 걸고 다녔다.
{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상해일(上亥日)에 궁중에서는 나이가 젊고 지위가 얕은 환관 수백 인을 동원해서 횃불을 땅 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돼지주둥이 지진다."고 하며 돌아다녔다. 또, 곡식의 씨를 태워 주머니에 넣어 재신(宰神)이나 근시(近侍)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또 여인들은 상해일에 두부로 얼굴을 닦았는데, 얼굴이 희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돼지의 검은빛과 반대되는 뜻을 취한 것이다. 여기서의 돼지는 지신(地神)을 상징한다. 이러한 행사는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었다.
특히 '업돼지' 이야기에서는 돼지가 길상으로 재산이나 복의 근원인 '업', 집안에 수호신(守護神) 또는 재물신(財物神)으로 인식했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는 전라도 지방에서 채록된 '업돼지'이다.
어느 날, 주인의 눈에만 보이는 돼지 1마리가 집에 들어왔다. 10년만에 그 집안은 천 석 갑부가 되고, 주인의 벼슬도 높아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돼지가 새끼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주인은 곧 망할 것이라 탄식하고 있는데, 돼지들은 엽총꾼들을 유인해 와 하룻밤을 묵게 하였다. 마침 그 날 밤에 떼강도들을 엽총꾼들이 물리쳐 그 집안의 재물을 보호하였다.
돼지에 관한 설화는 몇 가지 있는데, 여러 지방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금화군의 '금돼지와 최치원', 전북 순창군의 '원님 마누라를 잡아가는 금돼지' '금돼지 자손' 등은 모두 비슷한 이야기이다.
신라 때 어느 고을에 갑자기 금돼지가 나타나 사람을 납치해 갔다. 고을 원의 부인까지 끌고 갔다. 군졸을 풀어 산 속을 샅샅이 뒤져보니 동굴 속에 금돼지가 고을 원님의 부인을 차지 하고 있었다. 부인을 구할 길 없는 원님이 돼지는 사슴가죽을 무서워한다는 얘 기를 듣고 사슴가죽으로 된 쌈지 끈을 풀어서 '네가 제일 무서워 하는 것은 사슴가죽이다'고 위협해서 금돼지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부인을 구해냈다. 이 일이 있은 후 원님의 부인은 점점 배가 불러 열 달 후에 옥동자를 낳았다. 이 아이가 최치원(崔致遠)이다. 이로 인해 후세사람들은 경주 최씨(慶州崔氏)는 금돼지의 자손이라고 일컬었다.
속담에서 탐욕스런 성정(性情)의 사람, 게으른 사람, 미련한 짓거리를 하는 사람, 듣기 싫은 목소리로 크게 노래 부르는 사람을 보통 돼지에 빗대어 이야기한다.'돼지 같은 욕심' '돼지는 우리 더러운 줄 모른다', '돼지 멱따는 소리',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등의 속담에서 미련하고 게으르며, 지저분하며, 먹을 것이나 탐내는 동물로 돼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돼지는 지신과 풍요의 기원, 돼지꿈, 돼지 그림, 업돼지 등에서 길상으로 재산(財産)이나 복(福)의 근원, 집안의 재물신(財物神)을 상징한다. 그런가 하면 돼지는 속담에서 대부분 탐욕스럽고, 더럽고, 게으르며, 우둔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 즉, 돼지는 상서로움과 탐욕스러움의 서로 반대되는 속성을 갖춘, 이른바 모순적 등가성(矛盾的 等價性)을 지니고 있는 십이지의 마지막 열두 번째 띠동물이라 할 수 있다.
德 田 의 문 화 일 기. | bhjang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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