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불동(非禮不動)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볼 때 불은 예(禮)에 해당한다. 활활 타는 불을 '예'로 생각한 이유는 밝기 때문이다. 밝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는 '경우가 훤하다'는 뜻을 지닌다. 밝음이 '예'(禮)의 본질이다. 따라서 불은 경우에 어긋난 짓을 하지 않는다. 불은 훨훨 타 들어갈 때도 질서정연하게 타들어가는 속성이 있다. '예'(禮)에 대한 전고(典故)를 다시 소급해 올라가면 주역(周易)을 만난다. 바로 34번째 괘인 '뇌천대장'(雷天大壯) 괘를 보면 '비례불리'(非禮弗履)라는 대목이 나온다. '군자는 예가 아니면 밟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주역을 읽었던 공자는 이 뇌천대장괘의 '비례불리'라는 구절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논어(論語)에 이 구절을 자세하게 풀어놓은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논어에 보면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질문한다. 인에 대하여 공자는 4가지로 답변한다. 첫째는 비례물시(非禮勿視)요, 둘째는 비례물청(非禮勿聽)이요, 셋째는 비례물언(非禮勿言)이요, 넷째는 비례물동(非禮勿動)이다. 여기서 물(勿)은 불(不)과 같다.
공자가 제시한 인을 실천하는 방법은 '예가 아니면 쳐다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말도 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였다. 주역에 나오는 '비례불리'를 공자는 논어에서 이 4가지로 세분화시킨 셈이다. 공자의 주된 사상을 '인'이라고 한다면, 이를 실천하는 방법은 바로 '예'였던 것이다. 유교에서 '예'가 차지하는 비중을 읽을 수 있다.
논어의 이 4가지 '예'를 정치이념의 차원으로까지 몰고 간 인물이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 우암이 생존했던 숙종대에 당쟁(黨爭)이 가장 치열했고, 이 당쟁의 주제는 바로 '예'의 내용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놓고 노론과 남인 간에 벌어졌던 예송논쟁(禮訟論爭)이었다. 조선 당쟁사의 핵심은 바로 예송(禮訟)이었던 것이다. 우암이 공부하던 터가 충청도 화양계곡에 있는 암서재(巖棲齋)이다. 암서재 건너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절벽에 우암이 새겼다고 하는 '비례부동'(非禮不動)이 각자되어 있다. 불에 탄 숭례문(崇禮門) 뒤에는 이러한 유학사상의 배경이 깔려 있다.
출처 :성공의 연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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