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역학이야기

한국인 삶속의 팔자 타고난다? 따로없다?

깡통박사 | 2017-09-30 08:52:46

조회수 : 2,609

한국인 삶속의 팔자 타고난다? 따로없다?
 
소띠나 뱀띠 해 섣달이면 여아의 출산이 부쩍 늘곤 한다. 이듬해가 범띠와 말띠 해이기 때문이다. 태아가 여아인 것을 알고 정월 초에 태어날 예정이라면 제왕절개를 해서라도 이들 띠를 피하려 한다. 며느릿감이 범띠나 말띠면 한사코 손사래치는 어머니들도 적지 않다. ‘범띠나 말띠 여자는 팔자가 세다’는 속설 탓이다. 또 누구나 할 것 없이 신세한탄을 할 때면 “내 팔자에…”로 시작하는 팔자타령을 늘어놓는다.

이사를 갈 때는 물론이고 벽에 못을 박을 때도 ‘손’이 없는 날을 따지는 우리네 삶 속에서 ‘팔자’는 마치 화인(火印)처럼 깊이 새겨져 있다. 웃을 때도 팔자, 울 때도 팔자를 찾는 것이 한국인의 삶이다. <편집자 주>
 
 
국내 ‘점 산업’의 규모는 4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2조~3조원대인 국내 영화산업 규모를 능가하는 수치다. 이러저런 협회에 가입된 역술회원이 45만명에 달하고, 역술산업 종사자는 그 숫자를 집계하기조차 어렵다. 현재 포털에 자리잡은 역술 관련 인터넷사이트가 200개를 훌쩍 넘는다. 역술과를 둔 대학도 10여곳이나 있다.

지난해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성인 남녀 중 절반이 점을 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들 중 30%가량은 한달 평균 3만원 이상을 역술인에게 갖다줬다. 매달 10만원 이상을 지출하는 이들도 8%나 됐다. 10년간 점에 빠져 1억5000만원을 날리고 결국 빚더미에 앉은 조모씨가 TV에 출연해 자신처럼 되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무엇이 한국인을 점집으로 이끄는 것일까. 점집에 가면 언제나 묻게 되고 한결같이 듣는 팔자(八字)는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홍익대 인근의 한 사주카페에 들렀다.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를 적어 주자 이내 점괘가 나왔다. 본디 사나운 팔자인데 아내 덕에 그나마 입에 풀칠은 한다고 했다. 아내의 사주를 보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부모복보다 처복이 좋다’는 소리라 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잘하며 살라고 덧붙였다. 씁쓸함 속에서 묘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용하다는 용산의 점집을 찾았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며 결혼을 앞둔 듯한 선남선녀들이 여럿 기다리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그들의 얼굴은 대부분 밝아 보였으나, 더러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기도 했다.

“하는 사업마다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자 50대쯤으로 보이는 역술가는 앞서 적어낸 생년월일시를 보고는 “글방 서생으로 살 팔자가 장사를 하려고 하니, 될 일이 있겠느냐”며 “정 사업을 하고 싶으면 출판업 쪽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 역시 ‘처복이 좋다’고 했다.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정말 팔자라는 게 있는 것일까.
 
 
한국인의 삶은 ‘팔자’로 시작해 팔자로 끝난다. ‘타고난 팔자가 이것뿐’이고 ‘죽을 팔자라 그렇게 된 것’이다. 잘되면 팔자 덕이고, 잘못돼도 팔자 탓이다. 세상만사가 다 팔자 소관이다. 최근 열린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에 그친 김연아(18)가 “동메달을 딸 팔자였나 보네요”라고 말한 만큼 팔자는 한국인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문화’다.

이 때문에 불처럼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들도 궁합을 보고, 사범시험 준비생마저 점집을 찾는다. 모 재벌기업의 채용 면접장에 역술가가 버젓이 앉아 있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팔자는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 팔자라는 것이 있고, 모든 운명이 팔자에 달려 있다면 살아갈 낙이 없어진다. 게다가 같은 날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은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생년월일시로만 따지는 팔자가 똑같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말이 안된다.

독에 숨어 들어가도 피할 수 없다는 팔자, 개에게도 줄 수 없다는 팔자. 정말 팔자는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최근 ‘팔자 정말 있을까’를 펴낸 역술가 김민조씨는 “누구에게나 팔자는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한 부모에게서 나서 똑같은 훈육을 받고 자란 자식이 저마다 다른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팔자 때문이라는 게 김씨의 얘기다. 하지만 김씨는 ‘타고난 팔자가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얘기나 ‘부적 하나만 있으면 모든 화근을 막을 수 있다’는 따위의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나쁜 팔자를 타고났어도 ‘남을 도와 이롭게 할 배우자’를 만나면 운의 흐름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고, 천하를 거머쥘 팔자를 하늘로부터 받았다고 해도 그의 주변에 사람을 해칠 악운을 지닌 이들이 바글거린다면 패가망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씨는 또 점을 보는 것에 대해서도 “사주를 풀고 팔자를 알아 미래를 알게 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라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운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어려운 일을 극복하면 할수록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운의 이치다. 지금 당장은 힘든 사람도, 행복에 겨워하는 사람도 인생은 돌고 돈다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세상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돌고 돌듯이 평생 운이 좋은 사람도, 평생 운이 나쁜 사람도 없다. 하늘이 공평하게 나눠준 운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느냐가 ‘진짜 운명’을 결정한다.”

팔자는 하늘이 내려주지만 그것을 쓰는 것은 사람이라는 얘기다.


■ 팔자란?

“사람의 한 평생의 운수”를 일컫는 팔자(八字)는 사주팔자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주(四柱)는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네 간지(干支)를 일컫는다. 하나당 두 글자이므로 모두 더하면 여덟 자가 된다. 갑자년, 무진월, 임신일, 갑인시에 태어난 경우 ‘갑자·무진·임신·갑인’의 여덟 글자가 그 사람의 팔자다. 이런 팔자는 예부터 길흉화복을 점치는 ‘기초자료’로 쓰였다. 여덟 글자 속에 일생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어온 것이다. 지금도 결혼을 할 때면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함을 보내면서, 그 안에 신랑의 사주가 들어 있는 사주단자를 넣는다. 아내가 될 사람을 잘 먹여 살릴 수 있는지 신랑의 팔자를 ‘신고’하는 셈이다.

엄민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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