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역학이야기

한국의 명가 명택 (경북 영양의 시인 조지훈 종택 역사.인물) 1

깡통박사 | 2017-09-30 08:32:53

조회수 : 2,185

지조론’ 낳은 370년


명가의 저력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 ‘삼불차(三不借)’ 원칙을 370년간 지켜온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 조지훈도 삼불차 집안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라나 ‘지조론’을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굳세게 명가의 지조를 지켜오면서 박사만 14명 배출시킨 산골동네 주실마을 조씨 집을 들여다보니….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 ‘땡감을 따먹고 살아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라는 한국 속담이 있다. 죽어서 저승 가는 것보다는 어찌되었건 간에 숨이라도 쉬고 살아 있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만고풍상을 겪어본 팔십노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삶에 대한 애착이 어떠한 것인지를 새삼 느낀다.


냄새가 진동하는 개똥으로 범벅된 개똥밭에 굴러도, 떫디 떫은 땡감을 삼시 세끼 목구멍에 삼키더라도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사생관(死生觀) 아니었나 싶다. 정말 끈끈한 사생관이다. 필자가 과문한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어디에도 이처럼 질기디 질긴, 사생관이 농축된 속담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 속담대로라면 한국 사람들의 자살률은 세계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어야 맞지 않을까?


‘개똥밭에 굴러도’ ‘땡감을 따먹고 살아도’가 형성된 이면에는 우리 조선사람들이 겪은 근세 100년간의 눈물겨운 역사가 있다. 조선후기 탐관오리들의 끝없는 착취와 굶주림, 참다 참다 못견뎌서 백성들이 떨쳐 일어선 동학농민혁명과 죽음, 식민지 36년간 쥐어짜는 수탈과 압박, 뒤이어 6·25라는 겁살, 자유당 정권의 혼란과 부패….


정말이지 이처럼 눈물나는 근세 100년을 겪은 민족이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눈물어린 빵을 너무 지나치게 먹은 감이 있다. 근세 100년 동안 한국인들은 마치 공수부대의 살벌한 유격 훈련을 받았다고나 할까. 고강도 훈련 과정에서 고래심줄 + 잡초와 같은 끈기와 생존력을 체득하게 된 한국인이다.


혹독한 고생을 겪고 살아남은 인간은 대략 2가지 유형으로 변화해간다. 하나는 생존을 위해서 품격이고 나발이고 다 던져버리고 악착같은 인간으로 변해가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달관(達觀)하는 인간으로 변해간다. 비율을 따져보면 대략 8대 2 정도로 전자의 인간형이 많지 않나 싶다. 유감스럽게도 달관의 인품보다는 체면이고 자존심도 던져버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앞에 큰 감을 놓고 보려는 범부(凡夫)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우리 인간세상이다.


악착같은 인간형에게서 우리는 강인한 생명력은 느낄지 몰라도, 그윽하게 풍겨오는 초절(超絶)의 향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해관계 때문에 왔다 갔다 하지 않는 일관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도덕경’의 ‘총욕불경’(寵辱不驚:총애를 받거나 욕됨을 당해도 놀라지 않음)의 경지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소설가 서머싯 몸도 ‘서밍업(Summing up)’에서 ‘Man is inconsistent(인간의 속성은 일관성이 없다)’라고 설파한 바 있듯이, 범부가 일관성을 견지하고 지조를 지키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일관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현실에 돌아오는 결과는 불이익이라는 차디찬 열매였음을 길지 않은 인생에서 여러번 경험하였다.


그렇기에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년)이 죽으면서 남긴 절명시 한구절, ‘秋燈掩卷懷千古하니 難作人間識字人(가을 등불 아래에서 책을 덮고 지나간 천년 세월을 회상하니, 인간으로서 식자 노릇하기가 정말 어렵구나)’을 가슴속에 새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래에도 한국 사회의 여러 명망가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이해타산 때문에 왔다갔다 하다가 훼절하고 망신당하는걸 지켜보면서, 식자 노릇하기가 쉽지 않고 인간으로서 한평생 지조를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삶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물론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가기에는 우리 근대사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가시밭길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숱한 변절과 기만을 상황 탓으로 합리화하기에는 내면의 양심과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양심과 자존심을 지킨 지조 있는 인간을 보고 싶다!





지조론으로 유명한 조지훈


조지훈선생(趙芝薰, 1920∼1968년)은 시인이지만 그가 남긴 ‘지조론(志操論)으로 더 유명하다. 나 역시 조지훈을 시보다는 지조론의 저자로 기억한다. 지조론에 그 어떤 힘이 담겨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그를 ‘마지막 선비’ 또는 ‘지사문인(志士文人)’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명한 ‘지조론’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도자, 배신하는 변절자들을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조지훈은 말로만 지조를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처신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일제때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잡혀가 신문을 받고 풀려난 후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신분으로 숨어 지냈다. 비록 총을 들고 항일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비굴하게 일제에 날품팔이와 같은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林鍾國)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지훈을 꼽고 있다. 광복 이후 삶의 궤적을 보아도 선비로서 품격을 잃지 않았다.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필자는 조지훈이 남긴 어떤 시보다도, 바로 이 대목에 그가 일생 연마한 내공(內功)이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남긴 이 초식은 입에서 휘파람처럼 나온 소리가 아니라, 저 아랫배 단전(丹田)에서 수십년 가다듬어 올라온 소리임이 틀림없다. 매사를 파고 들어가면 연원(淵源)이 있고 끌탱이가 있는 법이다. 단전에 지조의 힘이 차곡차곡 쌓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적공(積功)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조론’을 낳은 조지훈의 연원과 끌탱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정신을 낳게 한 배경이 무엇인가? 그것이 궁금하였다. 한국이 비록 작은 나라지만, 국토가 좁다고 해서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찾아보면 골짜기 골짜기마다 그래도 인물이 있다. 천하명산(天下名山)을 주유(周遊)하는 취미를 가진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그 인물의 출산지를 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조지훈의 생가인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을 찾아가 보았다.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북 봉화쪽에서 청량산(淸凉山)을 끼고 돌아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에서 영덕 쪽으로 가다가 영양으로 꺾어 들어와 주실로 가는 길이다.


영양으로 가는 길은 부드러운 길이고, 청량산을 돌아 들어가는 길이 훨씬 장엄한 것 같다. 청량산이 어디 보통 산인가. 층층의 바위 절벽, 마치 중후하고 청결한 신사의 기품을 느끼게 하는 바위절벽이 돋보이는 산이다. 산의 이름처럼 산의 전체적인 기운이 맑고 상쾌하다. 이런 산이 남아 있다는 것은 축복 아니겠는가! 아직 관광객의 탁기로 오염되지 않은 산임을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이 항상 청량산을 흠모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내가 보기에 청량산은 야성과 품위가 어우러진 산이다. 승용차 창문을 열고 청량산 정기를 아랫배 단전으로 끌어당겨 본다. 단전으로 들어간 정기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나의 뇌수(腦髓)까지 충실하게 채워줄 것이 틀림없다. 이런 길이라면 돌아다녀 볼 만하다. 지금 이 길을 달리고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三不借의 조지훈 생가


청량산을 지나 첩첩 산중의 산길을 20분 정도 더 가니 주실마을(注谷里)에 닿는다. 동네는 60 가구 정도에 200명 남짓한 주민이 거주한다고 한다. 조지훈의 생가를 동네사람에게 물으니 동네 중심부의 맨 앞집이란다.


대문 옆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조지훈의 생가는 보통 집이 아니라 종택(宗宅)이다. 즉 그는 종가에서 태어난 것이다. 호은(壺隱)은 주실 조씨(趙氏)들의 시조이자, 1629년(인조7년) 주실에 처음 들어와 이 동네를 일군 사람의 호이다.


그러니까 이 집은 370년의 역사를 지닌 집이다. 4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집안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만한 노하우가 있었을 것 아닌가.


현재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조동길(趙東吉)씨를 만났다. 객지에서 공무원 생활하다가 정년퇴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종택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말년을 의미있게 회향(回向)하고 있는 셈이다. 생년이 신미생(辛未生)이라고 하니까 올해 칠십의 연세다. 꽉 다문 입과 약간 매서운 눈매, 그리고 깔끔한 차림새로 보아서 음양오행론으로 보면 ‘금(金) 체질’에 속하는 관상이다.


대개 금 체질들은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한 사무라이 기질이 강하다. 이야기를 할 때도 앞뒤가 분명하고 요점만 이야기하는 특징이 있다. 서론이 짧고 뼈다귀만 이야기하므로 인터뷰 상대로는 최적이다.


“호은종택에는 370년 동안 내려온 가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불차(三不借)라는 것이죠.”


“삼불차(三不借)가 무슨 뜻입니까?”


“3가지를 불차한다, 즉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죠. 첫째는 재불차(財不借)로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빌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불차(人不借)로 사람을 빌리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문불차(文不借)인데,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 삼불차를 호은(壺隱) 할아버지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삼불차 중 두번째의 인불차가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아- 그것은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 종가들은 중간에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많이 들였지만, 이 집안에는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16대 동안 양자를 들이지 않고 친자로 계속 이어져왔죠. 우리 주실 조씨들은 대체로 성질이 좀 꼿꼿한 편입니다. 머리를 숙이지 않으니 손해도 많이 봅니다. 주실 조씨들이 공직에도 많이 가 있는데 뇌물 받아 먹고 형무소에 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손해 보면 보았지 비굴하게 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


금체질의 검기(劍氣)를 지닌 조동길씨의 대답이다.


그렇다! 호은종택은 삼불차의 집안이다. 조지훈 선생의 집안에 370년 동안 이어져온 가훈 삼불차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살자는 정신이다.


가훈을 이렇게 정한 걸로 보아서 호은공(壺隱公)이라는 양반의 성품이 짐작된다. 대단히 자존심이 강하고 강직했던 분이었던 것 같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살자는 것이 어디 쉬운 각오인가! 그것도 당신 자신에게만 강요한 원칙이 아니라 후손 대대로 그렇게 살도록 당부한다는 게 어디 보통 신념인가!


이 쾌남아의 사주팔자(四柱八字)나 한번 뽑아보면 대강 어떤 사람인가 짐작해 볼 수 있을텐데, 생년월일을 알 수가 없고 초상화도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여하간 나는 삼불차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훈의 ‘지조론’은 삼불차의 바탕 위에서 나온 것이다. ‘강장(强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는 말마따나 그 선조에 그 후손이다. 조지훈은 어릴 때부터 삼불차 집안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랐기에 지조론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400년 가까이 내려온 집안의 자랑스런 전통을 돈 몇푼하고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일신의 출세와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이래서 전통은 무섭다. 전통은 불가(佛家)의 엄한 계율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조만 가지고 370년 동안 집안을 유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본다. 물질력 없이 정신력만 가지고 연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고금의 이치다. 강직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도 있어야 한다.


이런 각도에서 삼불차를 뒤집어 보자면,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재(財) 인(人) 문(文) 3가지 요소를 주실 조씨들이 갖추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돈이 없어서 굶어 죽는 상황에 무턱대고 재불차만 부르짖을 수 없은 법이며, 후사가 없어서 대가 끊어졌으면 현재까지 집안이 내려왔겠는가. 무식한 사람이 문불차를 주장한다는 것이 어디 성립될 수 있겠는가. 주실 조씨들이 재물과 인물과 문장을 유지해온 지혜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이 3가지 요소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재물을 보자. 호은 종택 앞에는 논 50마지기가 있는데 평수로는 1만 평이다. 이 논은 370년 전 호은공 때부터 마련해 놓은 문전 옥답이다. 중간에 누가 손댄 사람 하나 없이 현재까지 그대로 내려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실 조씨 집안의 박사들


인물과 문장을 보자. 주실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박사만 해도 14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궁벽진 산골 동네에서 14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는 동네다. 전북 임실군(任實郡)의 삼계면(三溪面)이라는 곳에서도 박사가 40여 명 나왔지만, 그것은 면 단위이고 여기는 일개 조그만 마을이다. 조그만 마을 하나에서 현재까지 14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더군다나 주실마을에서 나온 박사들은 시원찮은 나이롱들이 아니다. 한국 인문학의 대가(大家)들이다. 대표적인 3인방만 꼽자면 조동일(趙東一), 조동걸(趙東杰), 조동원(趙東元) 교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조지훈 선생의 호적 이름이 조동탁(趙東卓)이니까 이들은 모두 동자 돌림의 같은 항렬이다.


서울대 국문학과의 조동일 교수는 ‘한국문학통사’(6권)로 유명한 학자다. 한국문학 전체를 삼국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통시적으로 정리한 이 책은 문학 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까지도 필독서로 꼽는다. 조동일 교수 특유의 직절(直切)한 필치로 문사철(文史哲)을 꿰뚫은 명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동일 교수는 93년에 나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 책 ‘우리 학문의 길’을 펴낸 바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교수의 팬이 됐는데, 그는 외국이론의 수입중개상 노릇이나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학문의 수입업자나 하청업자 노릇을 하면서 행세하려고 하지 말고, 요즈음 유행하는 문자로 국제 경쟁력을 가진 자기 상표의 제품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생각이 깨인 다른 모든 나라에서 함께 채택하고 있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노선이다.”


그는 그만 굽실거리고 이제는 자기 상표의 제품을 내놓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주장한다. 조교수의 글에서는 ‘주체성’이 느껴진다. 지조와 자존감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국민대 대학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는 조동걸(趙東杰) 교수는 고려대의 강만길 교수와 함께 근세사의 양대 고수로 꼽히는 학자다. 또 성균관대 부총장을 지낸 조동원(趙東元) 교수는 발로 뛰어다니면서 한국의 금석문(金石文) 탁본을 20년에 걸쳐 정리한 ‘학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 7권)의 저자다. 남한 전지역의 비석에 새겨진 금석문을 집대성했기 때문에 현장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이 책만 있으면 원본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미술사, 역사, 불교 ,민속, 도교, 서예 전공자들에게 필수 장서임은 물론이다.


요즘에야 인문학이 파리 날리는 신세로 전락하여 겁없이 함부로 인문학을 전공했다간 자칫 쪽박차기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 그 민족의 혼과 정신은 역시 그 나라의 인문학에 들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인문학이 죽으면 그 나라의 주체성도 죽는다. 이런 점에서 주실마을 태생의 인문학자 3인방을 경외(敬畏)의 염(念)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조지훈까지….


주실마을 조씨들의 항렬을 따져 보면 동자(東字) 윗대 항렬은 영자(泳字)가 된다. 항렬 정하는데도 법칙이 있다. 오행(五行)의 상생(相生) 법칙으로 볼 때 목(木)인 동 자를 생해주는 것은 수(水)인 영 자 항렬이다(水生木의 이치).





납북 한의학자 조헌영


영자(泳字) 항렬 가운데서도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은영(趙銀泳, 1896∼1970년), 조헌영(趙憲泳, 1899∼1988년), 조준영(趙俊泳, 1903∼1962년), 조애영(趙愛泳, 1911년∼) 4남매가 그렇다. 은영은 일본 와세다대 출신으로 국립도서관장을 지냈고, 헌영은 일본 중앙대 출신의 유명한 한의학자이고, 준영은 보성고보를 나와서 초대 민선대구시장, 경북도 지사를 지냈으며, 애영은 여류 시조시인이다.


이중에서 조헌영이 바로 조지훈의 부친인데 한의학의 대가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납북된 뒤에도 한의학을 계속 연구하여 많은 한의학 제자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상당수의 이북 한의학자들이 그의 제자라는 것이다.


조헌영이 한의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다고 한다. 영문학도인 그가 엉뚱하게도 한방에 정통하게 된 것은 일본 유학시절 병에 걸린 친구를 치료하기 위해 독학으로 ‘동의보감’을 연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원래 조헌영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에 머물며 허헌(許憲)이 회장으로 있던 신간회 동경지회장을 지냈다. 귀국한 후에도 신간회 총무 간사를 지냈는데, 신간회가 해산된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하는 방편으로 서울 명륜동과 성북동에 ‘동양의약사’라는 한의원 간판을 달고 의원 행세를 하며 광복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한편으로 ‘동양의학사’ ‘통속한의학원론’ 등 전문 한의학서를 여러 권 저술했는데, 한때 한의과대학의 교과서로 사용됐다. 이 책자에 대해 경희대 한의과대학 김병운(金秉雲) 교수는 “한의학의 과학성과 민족의학적 가치성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입문서”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한의사 일 외에 조선어학회가 주관한 ‘한글맞춤법통일안’ 심의위원을 지냈다. 광복 후 고향에서 한민당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민족 반역자를 척결하기 위한 반민특위위원에 선임된 후 한민당과 결별했다. 2대 의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와 연속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6·25전쟁 때 납북됐는데, 북한에서도 한의학 연구서를 내는 등 북한 한의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북한은 88년 5월 평양방송을 통해 ‘조헌영이 노환으로 작고했다’고 그의 별세를 보도했다(조선일보 ‘新名家’, 1995.6.12일자에서 인용).


역사학자 조동걸이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기술한 ‘주실이야기’를 보면 1930년대에 조헌영이 약재를 채취하기 위해서 동네 초동(樵童)들을 데리고 경북 영양 일월산을 누볐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조지훈의 부친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근영, 헌영, 준영, 애영 4남매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바로 조인석(趙寅錫, 1879∼1950년)이다. 영자 위 항렬은 금(金)인 석자(錫字)이다(金生水의 이치). 조인석은 1900년 경 서울에 올라가 개화가 대세임을 목격하고, 동네에 돌아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종가이자 자신의 집인 호은종택에 설치한다. 그는 ‘초경독본(初經讀本)’이라는 청소년용 교육 책자를 저술하고 동네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계몽가이자 교육자였던 셈이다.


조인석은 자식 4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교육했지만 그 자신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여기에는 6·25 전쟁의 비극이 개입돼 있다. 당시 그의 3남인 준영이 경북도경국장을 지내고 있었기에 아버지인 조인석은 좌익 청년들에게 매일 시달렸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집에 들어와 “이 영감! 아들 어디에 있어? 아들 찾아내?” 하면서 칠십노인에게 반말로 모욕을 가하자 참지 못하고 마침내 근처 방죽으로 가서 투신 자살하였던 것이다.


나는 조인석의 자살도 주실 조씨들의 전통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존심과 목숨 중에서 자존심을 선택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은 칠십 나이가 되면 어지간한 수모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 마련인데, ‘삼불차’의 지조를 중시하였던 선비 조인석은 새파랗게 어린 것들로부터 이런 치욕을 받고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조인석은 조지훈의 직계 조부다. 1950년 당시 30세였던 조지훈은 칠십 조부의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기왕 족보 조사한 김에 조인석의 부친도 알아보자. 석자 위 항렬은 토(土)로 기자(基字)다. 조인석의 부친 조승기(趙承基, 1836∼1913년)는 일제가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을 하였다. 조승기 역시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행동하는 선비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실 조씨들은 학자도 많고, 그 학자들도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는 백면서생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 날릴 줄 아는 행동하는 선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실에서는 이외에도 많은 인물이 배출됐음은 물론이다.

 
조용헌 - 한국의 명가 명택 (경북 영양의 시인 조지훈 종택 역사.인물)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86 Fun 다음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86 Fun 다음
© 원제역학연구원

select count(*) as cnt from g4_login where lo_ip = '18.218.71.21'

145 : Table './wonje2017/g4_login' is marked as crashed and should be repaired

error file : /m/bbs/board.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