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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옹호의 기수 백두진 사주
Mr.대산 2017-10-04 (수) 13:10 조회 : 1573

백두진[白斗鎭]
 

양 력: 1908년 10월 31일 22:00  백두진
음/평: 1908년 10월  7일 22:00  남자
 

시 일 월 년
 

乙 己 壬 戊
亥 未 戌 申
 

辛 庚 己 戊 丁 丙 乙 甲 癸   대운: 순행
未 午 巳 辰 卯 寅 丑 子 亥
82 72 62 52 42 32 22 12 2.7
 

대운 시작: 2세 7월 8일
사망 일시: 1993년(86세) 9월 5일, 신미대운, 계유년 사망.
 

1908. 10. 31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 ~ 1993. 9. 5 서울에서 사망.
 

정치가.
 

제3공화국 시절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의장, 국무총리,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호는 소계(小溪).
 

1934년 일본의 도쿄대학[東京大學]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조흥은행에 입사해
 

1945∼50년 이사,
 

1949년 외자청장·한국식산은행장,
 

1950년 휘문의숙 이사,
 

1951년 재무부장관·기획처장을 지냈다.
 

1952년 국무총리 서리와 한미합동경제위원회 대표를 거쳐
 

1953~54년 국무총리를 지냈다.
 

1967년 제3공화국 시절에 민주공화당 총재상담역을 맡았고,
 

1967~73년 제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0년 한일협력위원회 위원장, 국무총리,
 

1971년 국회의장,
 

1971~84년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활동했다.
 

1973~80년 유신정우회 의원,
 

1973년 유신정우회 의장을 맡으며 유신체제에 참여했다.
 

전두환 정권인 제5공화국 시절에는 공식적인 관직을 맡거나 직접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구(舊)민주공화당 계열 인사들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다음은 일화 하나....
 
 
 
1979년 11월17일자 육군본부 검찰 진술에서 金桂元 비서실장은 車智澈의 오만방자한 행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1979년 6월 초순경 뉴관악 골프장에서 각하를 모시고 白斗鎭 국회의장, 車智澈 실장, 본인, 후쿠다 전 일본수상 등이 환영골포 대회를 가졌는 바, 당시 白 의장이 먼저 샤워장에 들어가 늦게 나오자 차지철이가 샤워장 문을 발로 차면서 “영감, 뭘해 빨리 나오시오” “그저 늙으면 죽어야 된다”고 독촉을 하므로 白 의장이 서둘러 나오면서 “미안 하외다”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차지철 실장이 아버지뻘 되는 白 의장에게 오만불손하게 방자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분격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음은 공재욱(상지대 교수)씨의 백두진씨에 대한 인물평입니다.
 

백두진(白斗鎭) (1908∼1993)
 

유신 옹호의 기수가 된 현실순응주의자
 
 

◦ 1949 외자청장
◦ 1950 한국식산은행 취두(은행장)
◦ 1952 재무부 장관 겸 국무총리 서리
◦ 1961 제 5대 민의원 의원
◦ 1967∼71 제 7대, 8대, 9대 국회의원
◦ 1973 유신정우회 의장
◦ 1979 국회의장
 

 
 

한국의 대표적 지배 엘리트
 

민족은 역사 앞에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주체요, 그 역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 이전의 실존하는 생명이다. 따라서 민족은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역사 앞에 살아 남아야 하고, 그 살아 남기 위한 민족적 용단이 10월 유신이었고, 민족중흥을 위한 광명정대한 논리가 유신의 길이었다.……특히 우리는 민족사의 정통 위에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기 우해 총화 체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총화가 잘못된 자유와 평등 때문에 훼손당할 수 없다. 보다 좋은 자유와 보다 좋은 평등이 총화 속에 성취될 때 한국적 자유와 평등은 혼미 속의 자유 우방의 밝은 등불이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유신의 역사적 가치가 될 것을 확신한다(『민족의 생존, 그리고 자유와 평등』, 『국회보』, 1978년 5월∼6월호, 제164호, 30∼32쪽).
 

박정희(朴正熙)의 독재 체제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던 시기에, 이렇게 10월 유신의 정당성을 소리 높여 외치던 사람이 바로 백두진이다. 그는 유신 시기에 '사실상 대통령이 지명하는 국회의원'이라는 자본주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유정회 국회의원의 한 사람이었고, 바로 그 유정회의 의장이었다.
 

그는 1970년대에 박정희 독재정권의 파수꾼 수장 노릇을 함으로써, 유신 체제의 몰락과 함께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나 관료로서의 생명도 사실상 끝나게 된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두 번의 국무총리와 두 번의 국회의장을 역임하였고, 5선 의원이며, 재무부 장관과 외자청장을 역임한 백두진은 관료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성공한' 한국의 대표적인 지배 엘리트의 한 사람이다. 그러면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일제 시대에 조선은행의 간부를 지내
 
 

백두진은 1908년에 황해도 신천읍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동경상과대학 상학전문부를 3년, 그리고 동경상과대학 학부에 입학하여 다시 3년을 공부하여 총 6년 동안 일본에서 유학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바로 조선은행에 취직하였는데, 1934년부터 1945년까지 11년 동안 조선은행에서 근무하여 서기부터 시작하여 간부급의 일까지 맡아보았다. 그는 서울 본점에서 일을 시작하여 진남포, 목포, 광주의 지점에 있다가 일제 말기에 다시 서울 본점에서 근무하게 된다. 광주에서는 지점 차석으로 있었고, 서울 본점에 와서는 당시 9억 원의 총대출을 책임지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 조선은행은 통화발행권을 이용하여 식민지 조선의 경제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만주 침략이후 더욱 심각해져 백두진 스스로도 자서전에서 "일본이 만주를 무력으로 석권하는 데 있어서 총칼, 은행권, 낭자군(娘子群)의 3요소를 기반으로 했던 것"이라고 적고 있다.
 

중국 진격에 조선은행권이 일본군의 군표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고, "조선은행은 점령군과 때를 같이 하여 그 지점을 개설하고, 소도시에는 파견원 사무소를 설치하여 군비 조달에 분망하였으니 이것이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침략이었다(《백두진 회고록》, 64쪽)"는 것이다.
 

조선은행의 간부직에까지 올라갔지만 백두진은 한 번도 일제 시대의 자신의 행적에 대해 반성하거나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도리어 자신의 이러한 경력을 기반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속편 앞부분에서 일제시기에 자신이 은행에 몸담았지만 상황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초기에 지방(진남포)으로 좌천되었던 경험을 적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첫 사회생활은 실패작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1930년대의 혹독한 식민지시기에 아무런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은행에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순응하면서 단지 지방으로 좌천되었던 경험을 대단히 의미있는 것인양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이러한 최초의 '실패(?)'의 경험 가운데에서 힘 있는 자에게는 철저하게 잘 적응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철학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족청의 재정담당 이사가 되다
 
 

8·15해방 당시 조선은행에는 한국인 직원이 전체를 통털어 200명도 안 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간부급은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조선은행에서도 8·15해방 직후 부일협력자 배척 운동이 일어나, 간부 직원이었던 사람은 사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것은 전체 사회에서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백두진과 같은 위치에 있던 사람으로서는 행운이었다.
 

결국 조선은행에서는 상층간부직에 있던 사람을 중심으로 운영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백두진은 그 위원의 한사람이 되었다. 또한 당시 시중은행과 특수은행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는데, 일반 시중은행에서는 조선은행이나 식산은행과 같은 특수은행은 일제 정책의 협력기관이었으므로 소위 민족 자본이 다소 가담되었던 조흥은행이 중앙은행으로 개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은행 사이의 갈등 이상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처음에 조선은행 총재에는 스미스(R.C.Smith) 해군 소령이 임명되었다. 미군정은 신탁 통치 문제가 정치 쟁점이 되던 시기인 1945년 12월 31일에 가서 조선은행에 한국인 이사를 선임하게 되는데, 이때 뒤에 자유당 간부가 된 최순주(崔淳周, 1950년대에 재무부 장관을 지냄), 구용서(具鎔書, 1950년대에 한국은행 총재, 산업은행 총재, 상공부 장관 역임), 백두진이 조선은행 이사가 되었다.
 

이리하여 은행의 운영은 실질적으로는 한인들이 맡게 되었는데, 이때 이북의 지점에 있던 김유택(金裕澤, 한국은행 총재, 재무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 역임), 유창순(劉彰順, 한국은행 총재, 상공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 국무총리 역임), 신병현(申秉鉉), 배제인(裵濟人), 허민수(許敏洙) 등이 조선은행 본점에 합류하여 있었다.
 

이들도 백두진과 유사하게 일제 시기에 조선은행에 근무하다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에서 지배 엘리트의 일원이 된 사람들이다.
 

미군정기 은행 업무는 군 정부의 적자 예산 지출과 무질서한 대출등으로 통화 팽창이 늘어만 갔다. 각 기업체에게 아무 검토도 없이, 자의로 대출하거나 정치적 고려에 입각한 대출도 많았다. 당시 우익청년단에 대한 지원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1946년 말에는 이범석(李範奭)이 민족청년단(이하 '족청')을 조직하였는데, 당시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미군정청은 조선은행을 통해 족청을 지원하게 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백두진은 족청의 재정담당 이사가 되었다.
 

미군정이 자금을 지원할 때 은행에서 도와줄 사람이 두 명 필요하였는데, 이러한 회계감사원의 역할을 유창순, 송정범(宋正範)이 맡았으며, 이 두사람을 통괄하는 역할을 백두진이 맡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제시기에 아무런 역사의식도 없이 일제에 순응하던 백두진은 미군정기의 좌우 대립 속에서 우익청년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40대의 국무총리
 
 

백두진이 이승만을 만나게 되는 계기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면서 미국과 남한과의 최초의 협정인 '대한민국 정부 및 미국 정부 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의 문안을 검토하는 자리에서였다.
 

이후 백두진은 기획처장의 물망에 오르기도 하는데, 백두진을 이승만에게 천거한 사람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범석인 것으로 보이며, 백두진 스스로도 그렇게 추정하고 있다.
 

1949년 1월에 드디어 백두진은 외자총국장(外資總局長) 자리를 맡게 된다. 이 외자총국은 곧 외자청으로 정부 조직에 편입되었는데, 외자청은 당시 한국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원조 물자를 관리하고 민간에게 불하하는 매우 중요한 기관이었다. 백두진은 바로 이 외자청장으로 관료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며 이후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는 것이다.
 

백두진은 1949년 1월부터 1950년 10월까지 외자청장직을 맡았으며, 외자청장 사임 후 얼마 안 되어 한국식산은행 취두(은행장)가 된다. 식산은행 취두로 있다가 1951년 3월 43세의 나이에 재무부 장관이 되었으며, 곧 1952년 10월부터는 재무부 장관이면서 국무총리 서리를 겸임하게 되고, 45세인 1953년 4월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국무총리는 1954년 3월까지 역임하였다. 이처럼 1950년대 초반기는 백두진에게는 관료서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두진이 젊은 나이에 관료로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일제에 순응하면서 은행 간부까지 지낸 경험이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 전반 백두진이 수행하였던 가장 중요한 일은 원조 자금 및 원조 물자의 사용에 대해 미국과 협상하는 창구 역할이었다. 1050년대에 원조 자금 및 워놎 물자의 사용과 그것을 민간에게 판매하여 형성된 대충자금의 사용을 실질적으로 통제한 최고의사 결정기관은 한미 합동경제위원회 (CEB:Combined Economic Board)이다,
 

명목상으로는 조정 및 자문기관 이었음). 그런데 이 합동경제위원회의 설치를 명문화한 "대한민국과 통일사령부 간의 경제 조정에 관한 협정(1952년 5월 24일에 조인됨:일명 '마이어 협정')"의 한국측 체결 당사자가 당시 재무부 장관이던 백두진이었다.
 

백두진은 재무부 장관 재임 기간뿐 아니라 국무총리가 된 뒤에도 합동경제위원회의 한국측 대표를 맡았으며, 국무총리를 사퇴한 다음에도 이승만의 요청으로 경제조정관(1954년 3월∼1956년 5월( 자격으로 한국측 대표를 계속 맡았다.
 

그 외에 백두진이 장관 재임 시절에 수행한 중요한 일로는 전시 인플레의 부담을 농민에게 전가시키는 세제라고 할 수 있는, 현물세제인 임시토지수득세법을 1951년 9월 9일에 국회에서 통과시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1950년대의 경제를 지탱시킨 두 가지 주요한 측면에 백두진이 모두 관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950년대의 한국 경제는 국내적으로는 농민의 희생에 기초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원조에 의존한 경제였다. 여기서 국가가 농민에게서 잉여를 수취하는 가장 중요한 제도가 임시토지수득세법이었고, 미국의 대한 원조 의 흐름을 통괄하는 기구가 합동경제위원회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백두진은 1960년대 이후 지속된 종속적인 불균형 성장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관여했던 것이다. 이 외에 백두진이 수행한 중요한 일로는 한국전쟁 이후 통화발행고의 증대로 인한 급격한 통화 팽창을 수습하고자 1953년 2월에 단행한 화폐개혁〔구화(舊貨) 100원(圓)을 1환( )으로 바꿈〕을 들 수 있다.
 
 
 
유신 옹호의 기수가 되어
 
 

백두진의 관료로서 전성기는 1950년대 전반기에 사실상 끝나게 된다.
 

1956년 경제조정관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백두진은 4년간의 공백기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공백 뒤에 1960년 이천군의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그 다음해 홍천-이천의 재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이렇게 제5대 민의원 의원으로 처음 국회에 진출한 것이 1961년 4월 24일로 5·16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기 얼마 전이었다. 곧 이어 일어난 5·16군부 쿠데타로 1961년 5월 28일에는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된다.
 

특별한 부정 축재 혐의는 발견되지 않아 체포된 지 77일만인 8월 13일에 무혐의로 석방되지만, 이후 백두진은 구정치인으로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1967년에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7대 국회에 진출할 때까지 사실상 정치 휴면기에 들어간다.
 

물론 이 시기에도 1963년 2월 27일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주도한 2·27 선서식에 초대되어 박정희가 요구한 몇 개 조항을 수락, 서약하는 문서에 서명하여 제출함으로써 정치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고, 1963년 3월 8일 김재춘(金在春)의 소개로 청와대에서 박정희를 처음으로 만나기도 하였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춘, 그리고 군부 세력의 실력자인 김형욱(金炯旭)과도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김형욱의 권유로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이 되는 1967년까지 약 11년 동안 권력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고 난 뒤 백두진은 1970년대에 더욱 철저하게 권력에 충성하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이미 신진 전문 관료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던 시기여서 백두진의 전문성은 락아 버린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두진에게 두 번째로 국무총리의 직책이 주어진다.
 

1970년 12월 20일부터 1971년 6월 3일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재직하게 되는데, 1950년대의 관료가 1970년대의 상황에 적응하기에는 이미 너무 낡아 버려서 오랫동안 재직하기도 어려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71년 5월 1일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의 전국구 후보 3번으로 당선된다. 그리하여 국무총리를 사임한 직후인 1971년 7월 27일 제8대 국회의 국회의장에 선출된다. 이때부터 1972년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될 때까지 국회의장을 역임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여당 출신 국회의장이긴 하지만 국회의장인 그가 박정희 대통령에 보낸 찬사를 보면 그 충성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내 자신 정부에 몸담에 국정의 일각을 맡아 본 경험에 비치어 박정희 대통령의 중책 수행을 위한 초인간적인 정신 발휘는 정말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그는 분명히 지혜로운 용기의 소유자이다. 국정의 처리 과정에서 발견되는 박 대통령의 용기는 치밀한 계획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지혜와 과단성을 동시에 소화할 줄 아는 참된 용기의 발동인 것이다. '휴식을 위한 휴식'을 거부하는 그는 대통령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장 성실하게 활용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지닌 것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훌륭한 매력은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용기와 풍만한 인간성이라고 믿는다.……여기에 첨가하여 필자가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다 더 중요한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그는 모든 사태를 정확히 투시하면서 적절한 대책의 수립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국가지도자로서의 기본적인 필수 요건을 완비하고 있다는 점이다(『내가 본 박정희 대통령-가장 성공적인 지도자』, 『세대』, 1972년 7월호, 《백두진 국회의장 연설문집》에 재수록, 185∼186쪽).
 

1950년대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그의 '애국심' 때문에 가장 존경하였고, 197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그의 '완벽한 지도력' 때문에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의 영구 집권 체제라고 할 수 있는 10월 유신은 백두진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유신 체제의 역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건국초기의 자유당 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지향이 주로 미국을 의존해서 민주화를 이룩해 보려는 모방기였다면 5·16을 계기로 일단 실패로 돌아간 모방의 체험을 바탕으로 정치적 자주성을 지향하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 실정에 알맞은 제도적 정착을 시도한 결과로서 선택한 것이 바로 유신 체제이다(『유신정우』, 1976년 9월호, 8쪽).
 

유신 헌법에 의하여 1973년 2월 27일 제9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구고히의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3명은 대통령의 친위 부대로서 대통령이 추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게 된다. 이때 백두진도 이 73명의 한 명으로 네 번째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이다.
 

이렇게 제9대 국회가 형성되고, 이 중에서 실질적으로 대통령이 지명한 국회의원들은 '유신정우회(이하 유정회)'를 결성하게 되는데, 백두진은 1973년 3월 10일에 이러한 유정회의 의장에 선출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백두진은 유신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의 수장 노릇을 하게 된다.
 

이후 백두진은 유신 체제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쓰게 되는데, 유정회의 기관지로 1973년 9월에 창간된 『유신정우』에 유신 체제가 몰락할 때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글을 기고하고 있다.
 

또한 외국의 저명인사에게 한국의 안보 상황과 유신 체제의 정당성을 알리는 서한을 끊임없이 보내기도 하였다. 질식할 것 같은 억압이 지속되었던 유신 체제에 대해 그가 어떻게 느꼈는가를 보는 것은 그의 의식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북괴의 도전을 지척에 두고서도 우리는 오늘 더없이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이충족감, 여기서 우리는 조국에 감사해야 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애국충정에 거듭 감사함을 금할 길 없다(『단결된 힘으로』, 『유신정우』, 1975년 12월호, 12∼13쪽).
 

백두진은 유신 체제가 몰락으로 치 닫고 있던 1979년 2월에 다시 국회의장에 선출된다. 하지만 이 국회의장을 마지막으로 유신 체제의 몰락(박정희 사망 1979년 10월 26일)과 함께 그의 정치 생명도 끝나게 된다.
 
 
 
 
출처 : 사주명리 - cafe.daum.net/sajusa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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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 사주 Mr.대산 10-0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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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번호 국민 097-21-0310-100 (임정환)


12-06 서미* (女) 궁합
12-04 김덕* (男) 사주
12-04 김주* (男) 사주
10-21 정미* (女) 궁합
10-18 한설* (女) 사주
10-16 박민* (女) 사주
10-16 노환* (男) 사주
10-14 이연* (女) 궁합
10-11 최동* (男) 사주
10-10 홍동* (女) 사주
상담후기
선생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적극추천
윤채영 | 조회수 : 118
꽃이 피기 참 좋은 계절이죠 적극추천
육다수 | 조회수 : 657
아내의 작명 및 개명을 위해 찾아봡고서... 적극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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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적극추천
김해연 | 조회수 : 3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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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의 중요성 한국역학의 계보
자강 이석영 선생(1920-1983)
1920년 평안북도 삭주 출생
청주대 법대 졸업
사주첩경의 저자
한국역학교육학원의 창립자
前 한국 역학계의 태두(泰斗)
벽천 김석환 선생(1933-2016)
1933년 출생
중앙대 법대 졸업
故 자강 이석영선생님의 계승자
한국역학교육학원 원장
한국역학인총회 총재
前 한국 역학계의 태두(泰斗)
원제 임정환
성균관대학교 법학과 졸업
벽천 김석환 선생 사사
한국역학교육학원 강사역임
MBC 문화센터 강사 역임
한국역학인총회 사무총장
前 동방대학원 박사과정 교수
기억에 남는 상담 에피소드
역학인, 그 거짓과 진실 [67909] (4)
사주를 상담하여 줄 수는 있으나 교훈은 줄 수 없는 경우 [64290] (2)
사이비 역술인의 폐해 [52036]
사주를 무조건 부정하던 경우 [63699] (1)
사주를 보면서 해줄 말이 없는 경우 [69716] (3)
사주가 맞지 않는 경우들 [67518] (2)
아들의 외고합격 [69642] (2)
젊은 여성의 임신 [22066] (1)
재벌 회장의 사주 [75760] (2)
유명가수의 사주 [70863] (1)
보험설계사 [7952]
이혼상담(마인드가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79732] (4)
결혼(역학을 배우면 운명이 바뀐다.) [74860] (4)
저서

제대로보는
야학노인점복전서
전2권 세트


제대로보는
적천수천미
전4권 세트


제대로보는
명리약언
전1권


제대로보는
궁통보감
전2권


제대로보는
자평진전
전2권

동영상강의

사주초급반

사주중급반

사주전문가반

육효반

신수작괘반

성명학반
잘못 알고있는 역학상식
찾아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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