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강희제 [康熙帝] [성조 강희제, 청 강희제, 아이신줴로 쉬안예, 천고일제]
순치(順治) 11년 음력 3월 18일 (1654년 5월 4일) ~ 강희(康熙) 61년 음력 11월 13일 (1722년 12월 20일)
丁 戊 戊 甲 乾
巳 申 辰 午 * 9세에 등극 61년간 제위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 임인년 69세 사망
丑 子 亥 戌 酉 申 未 午 巳 * 병진시나 무오시도 참고
황제의 명조를 함께 감상했으면 해서 올려 봅니다. 간명하기 전에 허튼소리를 먼저 하는 것이 특기이니 의견을 올려 보겠습니다. 황제의 명이라고 무조건 좋다 나쁘다라는 선입관은 일단 갖지 않았으면 합니다.
황제의 명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배경에서 시절이 황제를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근대에 대통령의 명조도 대통령의 팔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이나 시절이 대통령으로 주목되는 것입니다.
시대적 상황이나 시절을 인식하지 않고 사주를 간명한다는 것은 허공에 칼을 휘두름과 같습니다. 사주는 상식적인 선에서 세상 돌아가는 흐름에 적합하게 부합하고 살아가는 명인가를 우선시 살펴야 합니다.
이땅이라는 공간에서 이시절이라는 시간에 개인의 운명이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이땅이라는 공간에서 시절이라는 상황을 잘 전개하고 부합해 가는가를 살피는 것이 적어도 제왕을 알아보는 안목이라 봅니다.
진월에 갑목이 육신으로는 편관인데 년상에 있으니 대외적으로 사회에 접촉되는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이때 만약 일간이 근으로 해서 신왕을 이루지 못하면 살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소외되었을 것입니다.
편관이라는 것에 일간은 월주에 근으로 왕하여 식신에 좌했으니 이는 자신을 옹호해주는 이들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자질을 갖추었으니 청나라 시절에 신하와 백성에 주목을 받는 인물로 등극되었다고 봅니다.
육신으로 편관이라는 외부적인 환경에 일간은 적합한 자질을 갖추었나를 좀더 살펴 보겠습니다. 편관은 일간과 비견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자 들어왔는데 성가시다 역천하는 것이 식신으로 제살하는 것입니다.
단지 식신제살한다고 하여 제왕적인 풍모라는 것은 아닙니다. 편관이라는 것이 일간의 근을 살피는 것은 어려움을 함께할 충복을 원하고, 충신을 원하는 것과 같으니 생사를 함께할 세력의 유무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으로 왕한 식신이 살을 제살한다는 것은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방비하여 추종세력의 안전과 안락을 도모하고자 하는것이 식신제살인데 이를 하늘의 뜻에서 보면 역천하는 것일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편관은 인간사에 어려움과 불편함을 주고자 하는 것은 사실이나 어렵고 불편한 것을 알아야 사람은 손쉽고 편안함도 아는 것이니 사람은 끝임없이 식신제살로 안락과 풍요로운 삶을 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도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만을 원한다면 발전을 하지 못하니 다시금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어야 긴장하게 되고 다시금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세상은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편관도 재생살로 왕해야 하고 일간도 근으로 해서 식신을 발현해야 어려움을 그때 그때 해결하는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다는 말을 하는데 다만 이도 상호 왕쇠강약에 따라서 소소한 차이가 있습니다.
편관이 재생살로 왕한데 일간이 근이 무력하면 식신으로 발현하기 쉽지 않으니 불편한 상황을 쉽게 해결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가거나 타인의 힘을 빌려 쓰는 경우도 있고 자질부족한 현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편관이 재생살이 안되어 쇠한데 일간은 근으로 태왕하여 식신으로 발현하면 이는 가벼운 잘못에도 구족을 멸하고 씨족을 말려 더이상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는 지나친 방비를 하게 됩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눈에 성가시고 골치거리인 가문이 있다면 문제가 될까 싶어 미리 가문을 멸하고 다시금 문제가 될까 사돈에 팔촌까지 멸문지화하는 권력의 속성이 식신제살이니 역천인 것입니다.
제왕은 어려움과 불편한 속에서 안락하고 편이로운 세상을 만들기도 해야 하나 적절히 힘들고 긴장감이 돌아 땀내고, 노력하고 인내할줄 아는 이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 편관으로 부터 순천하는 것입니다.
편관을 식신제살하는 것을 역천하는 것이라면 살인상생하는 것은 순천하는 것으로 하늘의 뜻이라 한 것은 사람은 본디 공평한데 제살하여 편안한 사람도 있고 살인상생하여 어려움을 참고 인내하는 이도 있습니다.
몸은 불편하면 불편할 수록 단련이 되어 소림무사가 될 수도 있고, 몸은 편하면 편할 수록 깃털에 가위가 눌려 사경을 헤메기도 하니 사람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끝없이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이 건강합니다.
일국에 제왕이 개인의 편의를 위해 불편한 사람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으니 살인상생이라는 것은 어려움을 인내로서 참고 견디어 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군주의 아량이고 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편관에 편인은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동거동락하는 것과 같고, 편관에 정인은 고통과 어려움속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는 것과 같아 백성의 고충을 헤아려 지혜로서 정책을 펴 나갔을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살인상생이라는 것은 개인의 사리사욕이 없는 청백리같은 고귀한 인품과 같은 것이고, 식신제살이라는 것은 살인상생이라는 울타리에서 공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니 현직검사와 검찰총장의 차이가 이와 같습니다.
일간이 편인으로 신왕하다는 것은 지혜에 의지하여 작전과 전략을 짠다는 것인데 식상을 보면 적용시켜 간을 볼 줄 알게되고 재성을 보면 사람의 마음을 스스로 움직여 동요하게 하니 아쉬움을 알게 합니다.
다시 편인으로 일간이 신왕할때 편관을 보면 밖을 살펴 안을 살필줄 알게 되고, 정관을 보면 원칙에서 비원칙이라는 문제점을 알게하니 견제하여 융통성을 제시하여 절묘한 묘안과 대책이 강구하기도 합니다.
일간이 정인으로 신왕할때 식상을 보면 개인의 안위를 도모하게 되고, 재성을 보면 지식으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여 지식과 앎이라는 것이 세상에 질서를 만들기도 검증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정관을 보면 적합한 인물로 판정을 받아 결제권을 가지게 되고, 편관을 보면 유일무일한 경험치에 지식을 겸비하니 능히 세상을 이롭게 하는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는 신 지식인이라 불려지기도 합니다.
일간이 비견으로 신왕하면 가족이나 조직에 힘을 빌릴줄 안다는 것인데 이곳에 편관을 보면 조직을 이용할 줄 알게 되니 사람을 다룰 줄 알고 단체를 규합하여 적시적소에 살자와 죽일자를 알게 합니다.
정관을 보면 조직을 개편하여 아군 적군을 나누게 되고, 재성을 보면 공동으로 사회경쟁에 참여하게 되고, 식상을 보게되면 내일을 대신해주는 고마운 부하와 같으니 손과 발이 편해지기도 합니다.
일간이 겁재로 신왕하지 못하니 안은 살피나 밖은 살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인간의 잘못된 욕망을 알아야 부질 없음도 아는 것인데 자기 안에서 검증되지 못한 것에 앞장서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일간이 근으로 신왕한 것은 작게는 자립의지를 가지게 되고 크게는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를 말하는데 이곳에 편관을 보면 공을 세워 검증된 세력을 인정받는다는 말입니다.
정관을 보면 내부세력을 재점검하여 체제를 정비하게 되고, 재성을 보면 취하게 되고, 식상을 보면 실력을 발휘할 것이고, 인성을 보면 같은 이념을 가진자들과 규합하여 작전을 구상하기도 합니다.
일간이 무엇으로 부터 신왕한 것이 자질이고, 일간이 무엇이 없어서 신왕하지 않은 것도 또한 자질입니다. 일간이 무엇으로 부터 신약한지가 사회적조건이고 일간이 무엇이 없어서 신약하지 않은지가 배경입니다.
팔자는 모두가 자신의 모습이고, 운로라는 것은 시절따라 겪고 부딪히며 살아가야 되는 인생길과도 같은 것인데 무기는 팔자이고, 운로는 다만 때가 되어 발현되고 나타남과 같은 것이 운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격국도 아니고, 그져 일간을 중심으로한 육신으로 억강부약하는 상호관계로 설정한 일간 억부적인 관점에서 육신의 역활인데 이것으로 팔자를 보고 이해하는 것은 불과 30%로 밖에 되지 않는 일부분입니다.
丁 戊 戊 甲 乾
巳 申 辰 午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己
丑 子 亥 戌 酉 申 未 午 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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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인물검색 : 강희제 [성조 강희제, 청 강희제, 아이신줴로 쉬안예, 천고일제]
청나라의 제4대 황제 / 본명 애신각라현엽(愛新覺羅玄燁)
재위 : 1661년 ~ 1722년 / 별명 : 천고일제(千古一帝)
출생일 :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 / 출생지 청나라 북경 자금성 경인궁
사망일 :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 (향년 69세) / 사망지 : 청나라 북경 창춘원
황후 효성인황후 / 효소인황후 / 효의인황후 / 효공인황후 / 부황 순치제 / 모후 효강장황후
이전 황제 순치제 / 다음 황제 옹정제
묘호 : 성조(聖祖) / 시호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 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강희제가 쓴 당시(唐詩)강희제(康熙帝, 순치(順治) 11년 음력 3월 18일 (1654년 5월 4일) ~ 강희(康熙) 61년 음력 11월 13일 (1722년 12월 20일))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년 ~ 1722년)이자 1644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崇禎帝)의 자살 직후 명나라가 멸망한 뒤 청 군대의 입관(入關)[1] 이후 중국을 다스리는 통일 황조로서의 두 번째 청나라 황제이기도 하다.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휘는 현엽(玄燁)[2],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한국어 한자음으로 듣기 (도움말·정보), 중국어로 듣기 (도움말·정보) ), 짧은 시호로는 인황제(仁皇帝)이며 연호는 강희(康熙)[3]이다. 또한 만주어로는 얼허 타이핀 한(Elhe Taifin Han)[4][5], 몽골어로는 엔크 암갈란 칸(Enkh Amgalan Khaan)[6][7]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제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이자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紫禁城)에서 태어난 최초의 청나라 황제이다.
1661년(순치 18년) 부황 순치제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라 1722년(강희 61년)까지 재위하여 재위 기간이 61년으로 중국의 역대 300여 명의 황제 가운데 가장 길다. 8살이라는 정치를 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정치 상황이 좋지 않았으나 제왕학 수업을 하면서 동시에 정치를 배워 그를 이겨내고 내란과 국가적 위기인 오배의 난과 삼번의 난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고 정성공의 아들 정경이 다스리던 대만을 복속시켜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근대화의 발판을 서서히 마련하던 러시아와의 갈등도 있었으나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만주와 연해주 쪽의 국경을 확정한다. 청나라에 대항하던 북방의 몽골 오이라트 준가르의 칸 가르단의 군사를 자신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격파하여 북방의 안정을 가져왔다. 이러한 정책과 그의 통솔력과 카리스마, 치밀한 군사 전략, 안목을 바탕으로 강력한 절대 황제권을 수립하였다. 강희제는 강화된 황권으로 거의 독단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기에 자칫 전제 독재로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황권을 조절하고 정치의 일부는 재상들이나 대신들과 의논하였으며 한족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정책을 실행하여 이를 피했다.
강희제는 단호한 외정과는 달리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었는데 황하와 장강의 치수에 성공하여 농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으며 전란의 와중에도 세금을 줄이고 인두세 역시 영원히 동결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다. 한편으로는 《강희자전》, 《고금도서집성》 등 대규모 편찬사업을 벌여 당대의 문화발전과 현대 중국어 어법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화목을 꾀하였다. 또한 중국 역대 황조 중 마지막 태평성대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일으켜 아들인 옹정제(雍正帝), 손자인 건륭제(乾隆帝)까지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연호를 따서 강희대제(康熙大帝)로 칭송받으며 아직도 많은 중국인에게 크게 존경받는다.
그는 당시 서양에서 역시 절대 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 러시아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표트르 1세 등 업적이 많은 유럽의 여러 군주들과 더불어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는 통치자였다. 또한, 황후 4명 등 총 64명의 후비(后妃)와 잉첩(媵妾)을 거느려서 청나라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황제이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었다.
출처 : 청나라 강희제사주 - blog.daum.net/024614684